07-04 은행사거리 수학학원

고등학교

by 허지현

고등학교 때도 은행사거리에서 사교육을 받았었다. 수학 학원이 대표적인데, 예전에 엔터테인먼트 학원을 하다가 망한 아저씨가 자택에서 운영하는 수학 교습소였다. 독신이었고, 혼자 사는 아파트에서 학생들을 받아 과외를 하는 방식이었다.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조금 있었던 것 같고, 우리 엄마도 소개를 받아서 나를 보냈었다.


선생은 마르고 흡연을 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수업하다 쉴 때 개인적인 얘기를 해줬었다. 한 번은 자기가 차린 학원이 망했을 때 빚은 없었지만 통장 잔고가 0원이 되어 끼니를 해결할 길이 없자 남들이 먹고 문 밖에 내다 놓은 짬뽕 국물을 몰래 마셨던 얘기를 해준 적도 있었다. 흔히들 독신 남성들이 보이는 살짝 거친 면도 있었지만 의외로 순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따금씩 밖에서 물회나 샤브샤브 등을 사준 적도 있었다. 이 수학학원에 가는 길에는 은행사거리 쪽 상가건물의 꼼장어 가게와 갈비집 사이 통로를 지나가야 했는데 그 특유의 탄 냄새가 가끔 생각난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여자애들이 네 명 정도 있었는데, 다들 머리가 좋고 수재 느낌이 나는 애들이었다. 외모도 적당히 예쁜 편이었고, 전부 다른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다들 상위권에 있었고, 공부를 독하게 잘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조금만 더 재주가 있었거나 친해질 계기가 있었다면 더 친하게 지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점은 좀 아쉽게 남는다.


그중 한 명은 올리브색 파카를 입던 여자애였는데, 눈 오는 날 같이 눈을 맞으면서 걸어서 과외방에 도착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고서야 머리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는 걸 알았다. 또 다른 여자애는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드라마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혼났다고 했는데, 그게 서러웠는지 과외방에서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또래 여자애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그 애들에게 나는 아마 그냥 배경 같은 존재였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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