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개동철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도령 Sep 24. 2023

01. 삶의 의미와 운명

사고의 시작점

지난번 글을 다시 읽어보니 산만하고 너무 결론으로 건너뛴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우울과 불안, 이 두 감정은 어느새 나의 두 손이 되어있었다. 어딜 가든 나와 함께 했으며, 좋고 나쁘고를 떠나 나의 모든 행동의 이유가 되어있었다. 우울했기에 글을 썼으며 불안했기에 취업을 준비했다. 일들이 잘 되지 않으면 스스로를 자책하였고, 설령 잘 된다 해도 감정은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렇게 방식은 정답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람의 삶은 왜 불행할까? 애초에 불행과 삶은 무엇일까? 불행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등의 고민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게 되었다. 때로는 정리가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생각리 매듭짓지 못한 채로 덜렁 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정리된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세상과 자신 둘 중의 어떤 것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하는지는 참 어렵다.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확장시킬지 아니면 반대로 축소시켜 볼지 정답은 없을 것으로 생각되나, 여기서는 우주, 세상, 삶, 단체 등의 거시적 개념부터 시작해 개인의 신체, 감정 등의 미시적인 개념으로 생각을 좁혀 보고자 한다. 덧붙이자면, 이 모든 생각은 필자 개인의 볼품없는 지식으로부터 추론된 것이며, 당연히 정답은 아니다. 다만 필자 자신이 생각하여 삶을 살고자 하는 방식이니, 개인의 견해와 다른 바가 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삶의 궁극적 목적


서론이 또 길었는데, 가장 먼저 "삶의 궁극적 목적이 있는지"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정말로 한 사람의 삶에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그걸 평생 한 사람이 어떠한 근거를 통해 확신하고 믿거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떠한 일을 할 때 시작과 끝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중간 과정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예매해 둔 영화 시간대에 늦어 영화 중간에 들어와서 한 5분 정도를 시청한 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떠났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자신이 본 5분의 장면이 영화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다고 알 수 있을까? 필자는 이가 불가능하다 생각한다. 등장인물들 중 누가 주인공인지, 심지어 나오기는 했는지, 왜 어떤 일렬의 행동들이 일어났는지 그는 다만 추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존재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선조들이 있었고, 그들이 인류로 존재하기 전부터 생물들이 살았으며, 그전에는 생명이라는 개념의 희미한 무언가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들이 어떠한 목적으로 생겨났고 시작되었는지 지금의 우리들은 알 수 없다. 반대로 우리가 죽고 나면 후손들은 이어 살아가겠지만, 우리 자신들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혹은 알 수 있다고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개개인은 이 거시적인 세계 속에서 어떠한 의미로 자신이 생겨났는지, 어떠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인간 1명의 개체의 삶은 생물학적으로 모체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숨이 끊어지거나 심장이 멈춰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부의 반응이 없어지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영원의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80년 남짓한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역할이나 의미를 알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오만으로 보이기도 한다. 애초에 그러한 목적이 존재하는지조차 불명확한 상태이다.


운명에 대하여


이 궁극적 목적을 알 수 없다는 물음 외에도 운명에 대한 이야기도 해볼까 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필자는 지금으로서는 운명론자이다. 물론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결정된 운명에 따라 세상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아니다.

우리는 실험을 할 때 똑같은 양의 물질에 똑같은 조건과 영향을 주면 이전과 동일한, 혹은 적어도 비슷한 양상의 현상이나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고 그를 기반으로 문명을 만들어 생활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정해놓고 그를 똑같이 재현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 우리가 인지조차 할 수 없는 미립자들과 시간대까지 모두 동일하게 설정해 놓고 어떤 사건을 재현한다고 했을 때 과연 이전으로부터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적어도 실험의 재현이 가능한 현상으로 보아 같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우주의 물질에 일어나는 기본 상호작용(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외 새로운 물리 법칙이 매 순간 나타나고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모든 현상과 사건은 1:1 관계가 된다 매 순간은 이전과 다음 순간으로 엮이게 되고, 이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어제 있었던 일들이 있었기에 오늘 일들이 벌어지고, 내일 일어날 일들도 모두 정해지게 된다. 말인즉슨 온 우주의 사물에는 각자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 또한 사람 개개인 한 명이 완벽하게 인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계산을 할 때 우주의 모든 요소를 변수로써 고려할 수 없을뿐더러 모든 원자 하나하나 속 요소들을 원하는 상태로 고정시켜 재현은커녕 관측조차 하기 어렵다. 전자의 궤도를 완벽하게 알 수 없어 확률로써 계산하는 물리학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만에 하나 입자 등의 단위에서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 같은 생물체와 자연 속에서 벌어 나는 일로 계산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애초에 컴퓨터의 반응 속도 이상으로 빠르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통해 현상을 해석 및 예측하려는 것이 너무 과한 망상일지도 모른다.


아주 길게 횡설수설했는데, 결국 필자가 생각하는 바는 아래와 같다.

1. 작은 존재인 우리들은 각자의 삶이 우주처럼 큰 단위에서 어떠한 목적을 수행하는지 알 수 없다.(그 목적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2. 이 세상은 모든 구성 요소를 따지고 들었을 때 매 순간이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인지할 수는 없다.


이 무지에 대한 공포는 때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이어올 장들에서 설명하겠지만 사람은 무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진화론적으로 생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사람들이란 어떠한 특성을 가진 생물이고, 위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0. 개동 철학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