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2
2025년 2월이었나, 자청의 <본능분석과 반박제거> 영상을 처음으로 봤다.
당시 나는 IT 스타트업에서 개발빼고 모든 걸 하는 사람이었다.
입사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했으나, 마케터가 너무나도 필요하던 팀이었기 때문에 25년에는 마케터가 되었다. 그런데 관심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마케팅을 대체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서 일단 유튜브에 검색을 해봤고, 그때 이상한 마케팅 채널을 처음으로 접했다.
메타 광고 세팅하는 영상부터 시작해서, 눈을 잡아 끄는 영상들을 출퇴근길과 기상 후 뒹굴거릴 때 짧게 짧게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본능분석 반박제거> 영상까지 다다랐다.
당시 상세페이지를 짜거나 제안서 만드는 일이 좀 많았는데, 정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우리 회사가 대단한 성과를 이뤄낸 적이 없으니 매출이 000% 미친듯이 상승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일을 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사고의 프레임워크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상황에 맞는 틀을 찾으면 불필요한 고민과 의사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생각을 자유롭게 탐색해야 하는 예술의 영역과는 정반대다. 틀을 깨고, 틀을 장착하고의 모드 차이.)
그 영상을 약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중간에 사람들에게 소개하느라 몇 번 다시 보기는 했지만, 오늘 보고 드는 생각은 그때와는 좀 달랐다.
'나는 왜 본능 분석과 반박제거를 업무에만 쓰고 있었을까?'
스스로 느끼는 바인데, 나는 일할 때와 일기 쓸 때만 '숙고' 상태의 뇌를 쓴다. 전뇌, 즉 가장 늦게 발달한 사고력의 뇌는 거의 업무할 때만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본능에 나를 맡긴 상태로 산다. 회사 밖을 나서면 원시인의 뇌로 사는 것이다.
물론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한다. 어쨌든 '완전히 집중된 사고력'은 소모재라서, 내가 가장 공들여 쓰고 싶은 시간에 몰빵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업무 이외에, 예를 들어 주변 사람과의 관계나 일상의 사소한 문제에는 그렇게까지 사고력을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 게임으로 치면 로그아웃해버리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모든 순간에 자동적으로 사고력 모드가 켜진 상태라면 어떨까. (물론 매우 피곤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프레임워크를 돌리는게 아니라, 숨쉬듯이 자연스럽다면. 그게 습관이라면.
요즘 나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사실 업무 스트레스가 아니다.
IT 스타트업을 퇴사하고, 지방의 한 카페에 취직한 나는 사람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특히 나의 고용주 때문에 말이다. 왜 그동안 그들의 본능을 분석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내 불만은 기여도에 비해 임금이 너무 적다는 것인데, 돈 문제라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껄끄럽지만 일단 밑작업으로 그들의 본능을 분석하고 반박을 제거해보겠다.
이 작업에서 내 목표는 신규 런칭하는 브랜드의 메뉴 개발을 할 때마다, 품목별 인센티브를 따내는 것이다.
<대표님들의 본능 분석>
- 돈 많이 벌고 싶다.
- 돈 아끼고 싶다.
- 돈 많이주고 데리고 있어봤자 금방 나가버린다. 사람한테 돈쓰는 거 아깝다.
- 그놈이 그놈이다. 우리 회사에 오는 애들이 그렇게나 뛰어날리 없다.
- 우리는 해줄 만큼 좋은 대우 해주고 있다.
여기다 대고 "대표님, 저 메뉴개발 완료하면 인센티브 시원하게 챙겨주십시오." 했을 때 들을 가능성 있는 말들은 아래와 같다.
<반박제거>
- 계약 연봉이 있고, 너도 그 조건에 합의해서 입사한거 아니냐? 그런건 계약 조건에 없잖아.
- 내가 인센티브를 왜 줘야하냐? 니가 어차피 해야할 일을 한건데? 넌 인하우스 인력이잖아. 이런거 돈 안주려고 인하우스 부리는 거 아니야?
- 니가 전문적인 R&D 경력직도 아니고 그냥 초짜인데 돈을 따로 줘야해?
- 너는 지금 경험치라는 개비싼 자원을 얻고 있잖아. 돈으로 못산다고.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우리한테 감사해야지.
쓰다보니 개빡치네. 이제 이걸 한 번 제거해보겠다. 근데 화가 나서 반박제거가 아니라 반박반박이 될 것 같다.
1. 계약 연봉이 있고, 너도 그 조건에 합의해서 입사한거 아니냐? 그런 건 계약 조건에 없잖아.
계약 연봉에 합의한 것은 맞다. 그러나 나는 매장 스태프로 입사한거지, 메뉴 개발 팀으로 입사한게 아니다.
솔직히 시그니처 디저트를 덜렁 개발하라고 하는 것도 경력없는 신규 입사자에게 과도한 요구라는 것 알고 있지 않느냐?
더욱이 나 이외의 다른 직원에게는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나에게는 그렇게 기대를 하고 그에 대한 보상도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2. 내가 인센티브를 왜 줘야하냐? 니가 어차피 해야할 일을 한건데? 넌 인하우스 인력이잖아. 이런거 돈 안주려고 인하우스 부리는 거 아니야?
내가 안하면 외주 맡기셔야 된다. 외주 업체랑 할거면 일정을 조율해야 하니 시간이 딜레이 될거고, 시간이 딜레이 된다는 것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시기가 밀려나며 손해를 본다는 것을 뜻한다. 차라리 가까이서 즉시 소통할 수 있는 인하우스 인력에게 업무를 배당하고, 외주 비용의 일부라도 인센티브로 주는 것이 강한 동기부여 수단이 될 수 있다. 최저비용으로 의욕 100%인 개발 인력을 손에 넣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차피 해야할 일이 아니다! 하면 좋다였지! 내가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으면 좋고~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생각하셨지 않느냐! 내가 역량의 최대치를 발휘해서 결과를 만들어냈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는게 장기적으로 서로에게 이득일 것이다. 인센티브를 주면 기업에 대한 충성도도 분명히 올라가고, 내 퇴사도 늦줄 수 있고, 신입을 채용하고 교육하는데 드는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과 고작 내 인센티브가 등가교환 된다는 것은 정말 가성비 아닌가.
3. 니가 전문적인 R&D 경력직도 아니고 그냥 초짜인데 돈을 따로 줘야해? 가치입증이 안되어있잖아.
전문적인 메뉴 개발자에게 천만 원 쓰셔서 뭐가 남았냐. 망한 상품이지 않았느냐. 운영상의 효율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심지어 맛도 없었다. 매출이 6개월간 너무 낮아서 결국 버리지 않았냐.
그래서 내가 새로 메뉴 개발했고, 망한 메뉴와 비교했을 때 기간 내 판매량의 차이를 봐라. 분명한 차이가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가 외주 개발인력보다 낫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역량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는게 맞지 않느냐.
4. 너는 지금 경험치라는 개비싼 자원을 얻고 있잖아. 돈으로 못산다고.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우리한테 감사해야지.
맞다. 경험치는 분명히 내 자산이다. 그리고 감사한다.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맞지만, 나 스스로를 위해서 일한다. 나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회사의 업무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회사가 내 업무 수행을 칭찬해주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면 마음이 좀 꺾인다.
성과가 불확실한 상태라 인센티브 지급이 불가하다고 한다면, 조건부로 약속해라. 매출 00원, 00% 매출 증대 등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이루어 냈을 때 보상을 줘라. 서로 장기적인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내 만족도를 올려줄 수 있는 방법을 적용해라.
쓰고 보니 반박 제거가 아니라 반박협박인 것 같다.
인센티브 안주면 퇴사한다가 핵심 메시지인 것 같은데,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싸움이 날게 뻔하니 GPT에게 설득의 마스터처럼 다시 고쳐달라고 해봤다.
너무 감정적으로 깊이 개입해서 그런지, 객관적인 반박제거가 잘 안된다.
GPT가 제안한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나는 지금부터 투덜대는 직원 A의 자아를 버리고, 런칭 리스크를 줄이는 PM이 되어야 한다.
"안 해주는게 말이 되냐"가 아니라, "이렇게 하는게 비용상 효율적이다"라는 제안을 하는거다.
요지는,
1. 메뉴 개발 업무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
2. 매장 운영과 메뉴 개발을 인하우스에서 병행하는 구조가 가장 효율적이다.
3. 그러나 병행구조는 일정과 품질, 두가지 조건이 흔들리기 쉽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룰을 만들었다.
“현재 저희 인력 구성에서 가장 합리적인 건 기존 업무+개발 병행이에요. 그래서 그걸 제가 맡기로 했죠.
다만 매장업무과 메뉴 개발을 병행할 경우, 일정이 끝없이 딜레이되거나 제품 품질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산출물 기준, 성과 기준, 수정 횟수 제한을 명시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메뉴 개발을 계속 맡는 대신, 프로젝트 인센티브 룰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걸 기본 연봉 얘기가 아니라 ‘신규 런칭 메뉴 개발’에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이걸 내 입으로 정말 말 할 수 있을까?
이 주제로 분위기가 싸해지고 관계가 어그러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높은 확률로 클루지일 것이다.
더 건강한 조직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하는 말이다.
일단 이 부분 때문에 스스로 동기부여도 계속 안되고, 혼자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대표들 얼굴을 볼 때도 점점 언짢아 질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맡긴 동료잖아!!!!
조직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말이고, 나 이후의 사람을 위해서도 싸워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 못한 본능도 짚어줬다. "기어오르는 느낌" 진짜 핵심적인듯. 대표란 기본적으로 지배 시스템이 있고, 권위에 도전 받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통제권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