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이 아니다

그의 뜻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걸 몰랐다

by 이언니


첫 만남에서 대표는 자신을 오픈마인드의 미국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모든 제안에 열려 있다고 했고, 위계보다는 성과 중심의 미국식 방식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열심히 생각했다.

지금 회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필요할지, 내가 주인이라면 어떻게 할지를.

기획안을 만들고, 세부 실행계획까지 썼다. 누구보다 꼼꼼하게.

그리고 보고했다.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며 나의 기획안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한테 지나치게 심각하다는 말까지 했다.


평소보다 두 배로 일했는데, 열정은 반으로 식었다.

그냥 시간이나 때우고, 다음 이직이나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인도 아닌데, 왜 이 회사의 방향을 정하려 했지?

주주사가 나를 대표로 선임한 것도 아닌데,

경영에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질 위치도 아닌데,

왜 나는 회사의 미래를 내가 주인인 것처럼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회사 매각 당시,

주주사는 사내 유보금까지 들춰보며 공부했고,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자까지 모았다.

위험을 부담하고, 돈을 쓰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경영권을 가졌다.

그리고 대표를 선임했다.

그 권한은 내가 아니라, 그에게 간 거였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를 관찰하게 됐다.




겉으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0.1초, 아주 짧은 순간 얼굴에 티가 난다.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 오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완벽주의자이고, 오류를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이미 갈 길을 정해뒀다.

“자유롭게 제안하라”고 하지만, 그 제안은 사실상 정답 맞추기에 가깝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방향을, 우리가 눈치껏 파악해 말로 풀어내길 기대한다.

아이디어를 내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뜻을 구현할 방법을 갖다 바치라는 뜻이다.


덕분에 나는 그의 말투, 표정, 호흡 하나하나에 예민해졌다.

이 사람이 지금 원하는 타이밍이 뭘까,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뭘까.

이상하게도, 그런 사소한 것들이 누적되면서

나는 조금씩 그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으로 미루겠다.




지금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다.


나는 이 회사의 주인이 아니다.

회사에 문제가 생겨도 내가 책임질 수는 없다.

나는 그저 구성원이고, 누군가가 그려놓은 그림 안의 작은 부품이다.


주주사도, 대표도 나에게 회사의 방향을 정할 권한을 준 적 없다.

그들은 회사의 인수라는 내가 하지 않았던 노력과 리스크를 떠안았고,

그에 상응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단순하다.

주인이 가고자 하는 길을, 내 자리에서 밀어주는 일.

지금은 그걸 받아들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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