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세계에 편입되기로 한 나의 이야기
나는 이 회사를 잘 다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새로운 대표를 관찰했다.
그가 그리는 청사진을,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완성해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냥 일을 ‘잘’ 하는 게 아니다.
그가 짜놓은 문맥 안에서, 그가 쓰고 싶은 방식으로,
내가 쓸모 있게 작동하길 원한다.
하나의 부품으로서, 정확히 그 자리에 맞게 기능하기.
지금은 그걸 하고 있는 중이다.
대표는 엘리트다.
문제의 본질을 단숨에 꿰뚫고, 불필요한 설명 없이 단순화시킨다.
그의 손에 문제는 구조가 되고, 구조는 단계가 된다.
헤매지 않는다. 잔가지는 쳐내고 본질만 잡는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너무 확고해서, 틈이 없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그가 정해놓은 답 안에서만 수용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는 자신이 열려 있다고 믿는다.
자유로운 소통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아이디어를 제안하라” “전문가니까 재량껏 해보라”
하지만 그 말엔 생략된 핵심이 있다.
(단, 나의 정답 안에서)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연히, 몇 번을 헛발질했다.
처음엔 내가 이상한 줄 알았다.
왜 내 제안은 채택되지 않을까.
왜 내가 내는 아이디어마다 방향이 어긋날까.
그러다 깨달았다.
그가 말하는 “제안”은 선택지가 아니라 정답 맞추기다.
그의 뜻을, 그의 언어로, 그의 속도로 제시하는 것.
이해했다.
중간에 몇 번 단서가 있었다.
내가 보고 중 다른 기업 사례를 들면, 그는 꼭 그 회사 CEO나 유명 인사를 자기 지인이라고 구태여 묻지 않은 설명을 했다.
TMI였고, 그의 숨겨진 자격지심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됐다.
그건 무의식적인 자기 포지셔닝이라는 것을.
“나는 너와는 다른 레벨에 있는 사람이다.”
그걸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내가 눈치 빠른 편은 아니니까.
눈치를 배우고 있긴 하다. 이 조직에 어울리기 위해.
결정적인 단서는 따로 있었다.
대표가 이 회사에 합류하면서 데려온 CFO.
처음엔 CFO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전문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동시통역사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퍼즐이 맞춰졌다.
동시통역사는 본인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대표 같은 유형에게 필요한 건 정확히 그런 파트너다.
‘자기 확신’을 누구보다 깔끔하게 풀어내 줄 수 있는, 손발.
그녀는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는 어나더 레벨의 엘리트고, 나는 그가 써 내려가는 성공 스토리 속에 배역을 맡은 사람이다.
내가 맡은 건 엑스트라 23번쯤.
순번은 그냥 느낌이다.
자잘한 일로 자주 호출되니까 그 정도 위치는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세상엔 다양한 리더십이 있다.
이번 대표는 ‘엘리트형’이다.
강하고, 명확하고, 단단하다.
어차피 회사를 잘 다녀보기로 마음먹은 거,
이번엔 이 세계를, 이 사람을, 이 조직을 온전히 경험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