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

설 그즈음에

by 덜깬잠꾼

그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배어 나온다.

그 시대 그 나이 때만 겪을 수 있는 것들은 숨기려 해도 튀어나온다.

서울 사람처럼 말하다가도 입에 밴 사투리가 튀어나오듯.

전라도가 고향인 나는 "거시기"가 그렇고 "긍개"가 그렇다.



아무리 틀렸다고 해도 바꾸지 못하는 것도 있다.

문법이란 것을 배우기 전에 그 시대 사람들의 입에 배어 버린다.

학교 다닐 때 나쁜 짓은 옥상(屋上) 안 가고 "옥상 위"에서 한다.

옥상 위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는 역전(​驛前) 시계탑이 아닌 "역전앞 시계탑"에서 만난다.

지금 잘 살고 있는 여자랑은 처가(妻家)가 아닌 "처갓집"에만 간다.

"처가"에 가면 웬지 씨암탉도 못 얻어먹을 것 같아서 "처갓집"에만 간다.



"시합"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촌티가 난다.

요즘 사람들은 잘 안 쓰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알아들어버린다.

옛날 사람이다.

시합하자는 말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 여럿이 하자는 말이다.

시합에서 이겼다는 말은 혼자 잘해서가 아니라 같은 편이랑 잘해서 이긴 것이라 더 좋다.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하는 것을 좋아서일까?

핸드폰 게임이 아닌 시합이 하고 싶은 나는 옛날 사람이다.



"구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왠지 좀 묵은 티가 나거나 폄하되는 느낌이다.


요즘 애들은 들어서는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민속의 날"이라고도 불렸다.

생각 없이 들으면 하지부터 동지까지 청명, 단오, 추석과 같은 옛날 것들을 다 지칭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최대 명절이 깡그리 무시당하는 느낌이다.



"설날"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제일 깔나는, 제일로 잘 어울리는 단어다.


설날에는 없는 살림이지만 부자 코스프레가 자연스럽다.

자서는 대님도 매지 못하면서 결혼할 때 말고는 꺼내지 않았던 비 한복을 어보고 싶기도 한다.

세뱃돈은 빳빳한 지폐다.

까까 먹는 애들에게는 배추색을, 유치원만 다녀도 노란색으로 챙긴다.

"꼬까옷"이나 "설빔"을 예쁘게 입은 애들은 "봉투 봉투 열렸네!"를 대놓고 노래 부른다.

애들은 떡국을 먹자마자 무릎이 닿도록 세배드릴 어른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된다.



평소에 건강에 좋지 않다고 손도 못 댔던 조청 듬뿍 바른 한과가 참 달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잡채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다.

동면에 들어갈 곰도 아닌데 집안 가득 기름 냄새가 밸 정도로 많이 만든 명태 전이나 고기 들어간 깻잎 전으로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운다.


떡국 먹으면 한 살 더해진다고 나이 드니 영 숟가락이 안 간다.

마지못해 젓가락으로 깨작거린다.

떡국 속 고기만 골라먹는 는 나이 먹기 싫은 옛날 사람이다.



조금은 시끌벅적한 설날을 만들어 보련다.

이제 막 돌 지난 손주 놈 꼬까옷부터 하나 장만할까 하다가도

딸의 눈높이에 맞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 빳빳한 세뱃돈으로 준비하는 나는 옛날 사람이다.

화투도 한모 사놓고 아들이랑 사위랑 고스톱도 치고,

못하는 술이지만 예쁜 딸 뺏어간 미운 사위 놈에게 술이라도 한잔 따라 줘야겠다.


설은 유독 설답게 보내고 싶은 나는 옛날 사람이다.

그런 옛날 사람에게 여자는 한 마디 할 것이다.

"올해도 건강시다.!"


그 말이 "돈 잘 벌어와"라고 들리는 걸 보니 옛날 사람이다.

이 나이에도 돈 벌어 올 수 있다고, 나만 믿고 사는 여자랑 살고 있는 나는 참 복 받은 놈이다.



돈을 많이 벌기로 했다.

그래서 내년 설에도 손자 놈에게 꼬까옷도 사주고 세뱃돈도 줘야겠다.

내년 이 맘쯤에는 친손주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는 나는 옛날 사람이다.

그래서 올 한 해도 건강하기로 했다.

나이가 하나 더 느는 대신,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떡국이 참 맛나다.

2026. 02. 15 덜깬잠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