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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Feb 03. 2022

Pretty Woman

장모님 왈,

올해 설에는 처가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한바탕 윷놀이를 시끌벅적 놀았다. 그 누구보다 씩씩하게 윷가락을 척척 던지시면서, 말판을 이리저리 놓으라 말라 호령(?)하시고, 만면으로 활짝 웃으시는 장모님을 뵈면서, 우리 온 가족은 진심 힐링을 가득 나눠 받았다.


장모님께서는 칠팔년 전부터 아주 약한 치매 증상이 와서 꾸준히 치료를 받고 계신다. 워낙 활동적이신데 코로나 상황으로 노인학교가 쉬니 종일 댁에 갇혀 계신다. 색칠하기, 종이접기도 하시고, 답답하시면 큰아들 일터에 쫓아가셔서 지켜보다 오기도 하신다.


언젠가부터 음식 만들기에서 손을 떼셨다. 바로 전에 넣은 양념을 자꾸 잊으시니 제대로 맛 내기가 어려워 지신 게다. 무엇보다 매사에 쾌활하고 긍정적이신 분께서 자신감을 잃으신 게 정말이지 안타깝다. 그래도, 자식들 혹여 걱정할까 봐, "에고, 이젠 귀찮아서 못 하겠다. 니들이 해라!"라고 애두르신다.

  

한 번은 모시고 점심 먹으러 가는 차 안, 그 20분 남짓에도, "우서방, 노니까 좋지?"하고 예닐곱 번을 물으신다. "네, 진작 이럴걸요! 장모님 모시고 점심도 먹잖아요.", 나도 똑 같은 대답을 똑 같은 횟수로 되뇌이다가, 마지막 몇 번째 쯤에 그만 눈두덩이가 불끈했다. 은퇴해 노는 사위를 향한 깊은 걱정, 그 다정하심에 감동한 만은 아니었다.


원체 유쾌하시고 유머가 많은 분이셨다. 일반적으로 치매 초기에는 주로 단기기억과 추론에 곤란을 겪지만, 그나마 장기기억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장모님과의 대화는 지금도 여전히 경쾌하고 즐겁다.  


*************

장모님 왈, 딸은 답!

"니 시어머니는 혼자서 잘 사시냐?", "그럼, 건강하게 잘 지내시지!"

"근데, 니 시어머니는 아들도 없냐?",  "있지, 왜 없어!"

"근데,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 "?!?!(묵언)"


*************

TV에서 노인 가출 뉴스를 보던 딸과 아들,

"엄마, 밖에 나가서 혹시라도 길 잃으면 그때는 꼭 가까운 경찰서에 가야 해!"

"아니면, 엄마, 택시 잡아 타고 OO체육관 가자고 해도 되요. 거기서는 금방 찾아 오잖아!"

자신감 뿜으시는 장모님 왈,

"그래! 그럼 지금 나 어디다 버리고 와 봐!"


*************

생신날 아내가 용돈을 좀 드렸다. 잘 받았다 하시는 장모님 왈,

"돈은, 사위가 주면 서서 받고, 아들이 주면 앉아서 받고, 남편이 주면 누워서 발가락으로 받는 거야!"


*************

친구 본인상으로 장례식에 다녀 왔다. 장모님 왈,

"친구도 없는데 거길 왜 가?"


*************

손녀 남친이 광산 김씨라는 말을 들으신 장모님 왈,

"광산 김씨 사람들이 다 참 좋아! 착하고, 똑똑하고... 우리 아버지가 광'산' 김'씨'야!"


*************

“엄마, 다음주가 어버이날이잖아!”

“어버이날 나하고는 상관없다. 얘기 하지 마라!”

“왜?”

“나는 다 돌아 가셨거든…!”

“그래도, 엄마가 우리 엄마잖아! 그런데, 날 잡기가 어려워서 어린이날 모이기로 했어.”

싫다, !  어린  아니다.”


증상만으로 봐서는 다행히 장모님은 여전히 초기시다. 꽤나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크게 악화되지 않으시고 건강상태도 비교적 좋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쩔 수 없는 단기기억 상실이라면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당신께서 행복하셨던 그 옛날 기억들을 알뜰살뜰 잘 챙겨셔서 더디 더디 잊으시고, 그 기억들 하나씩 돌이켜 유쾌하고, 예쁘고, 즐거운 인생, 오래오래 이어가시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또, 그 모든 것들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가족들 기억 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아주 먼 먼 훗날 훗날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기기억으로 남을 터이다.


요즘들어 부쩍, 장모님이 차려 주신 오징어무침과 된장박이 꽃게찜이 너무너무 먹고프다. 뭔가 아쉬울 때는 뭐니뭐니해도 아부가 특효다.


우리 장모님은 My Pretty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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