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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Jan 28. 2022

그냥 아이들은 스스로 크는 겁니다.

 짤막한 나의 아이들 기록

아이들 어릴 때 틈틈이 적어 둔 짤막한 기록들인데, 작정하고 쓴 게 아니라 뜨문뜨문이고 그마저도 조금 쓰다가 말았다. 가끔 열어 보면서 혼자서 키득키득한다. 10년 후쯤에는 아이들의 아이들도 적어 둬야지, 그리고 또 그 10년 후에 그 아이들에게 읽혀 줘야지! 그래서, 한 20년쯤은 더 살아 볼까 생각 중이다.


미술학원 간 첫날(2000.3)

딸이(여, 6세)가 3년째 다니는 유치원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뜽이(남, 3살)와 함께 미술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딸이네 반은 “다빈치”반, 뜽이네 반은 “피카소”반이다.

새로 간 학원이 재미도 있었겠고, 난생처음 동생과 단둘이 어딜 다녀왔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신기하고 대견했나 보다.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딸이가 할머니께 전화를 했다.

[딸이] : 할머니, 나 오늘 뜽이랑 미술학원에 갔다 왔다.

[할미] : 으응, 그래 재미있었겠구나!

[딸이] : 그런데, 나는 으…음! 그런데, 음…음! 나는 “눈치코치”반이고, 뜽이는 “피카츄”반이다!
다빈치가 누군지, 피카소가 누군지 도무지 알 리가 없는 아이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무럭무럭 커 간다.


몬트라스?!?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매회 새 몬스터가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이름, 능력, 특징, 진화형태 등이 소개된다. 새 몬스터를 소개하는 바로 그 순간인데, 뜽이가 마침 화장실 갔다 오느라 놓치고 말았다. 딸이도 딴 전을 부리다 역시 못 들었다. 아빠는? 당연히 관심 일도 없다.

[뜽이] : 아빠! 이름이 뭐래?

[아빠] : 못 들었어!

[뜽이] : 으응!

[딸이] : 뜽아 이름이 뭐라구?

[뜽이] : '몬트라스'래!


드라이버 찾기

[엄마] : 도라이바가 어디 있지! 아무리 찾아도 없네…!

[뜽이] : 엄마, 어디 있는지 내가 알아. 찾아올게!

그리고는 베란다도 쫓아 나가서 장난감 상자를 한참 뒤지더니,

[뜽이] : 엄마, 여기 있잖아!

손에는 도라에몽(만화 캐릭터)이 자랑스럽게 들려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벽에 붙여 놓은 동물 그림을 보고 그 이름 알아맞추기.

[엄마] : 이 게 뭐야?

[뜽이] : 병아리!

[엄마] : 이 건?

[뜽이] : 송아지!

[엄마] : 이 건?

[뜽이] : 강아지!

[엄마] : 이 건?

[뜽이] : 으......음, 음.....그러니까 음, 당나말!


나는 지구를 지키는 용사!(2000.3)

뜽이가 미술학원에서 친구와 싸웠다. 오른쪽 볼에 손톱자국이 깊게 파인 걸로 봐서 격전(?)을 치른 게 분명하다.

[딸이] : (고자질) 뜽이가 학원에서 싸웠는데, 걔가 막 울구 그랬어!

[엄마] : 뜽이는 안 울었니?

[뜽이] : 안 울었지! 나는 메가레인전데….!

☞ 메가레인저 : 지구를 정복하려는 악당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초능력 5인조 용사.


일상이 변신(2000.3)

레인저들은 메가호에서 호출한 합체 변신 로봇을 조정해서 거대 변신 외계 괴물들과 대결한다.

뜽이 머릿속에는 메가레인저, 변신, 합체, 로봇이 한시도 떠날 날이 없다.

색종이를 대각선으로 반 접어 놓고서는,

[뜽이]: 엄마, 색종이가 변신했어!

빈 종이에다가 직선 2개를 걸쳐서 그려 놓고서는

[뜽이] : 엄마, 이게 뭔 줄 알아?

[엄마] : 글쎄!

[뜽이] : 이게 합체야…!


나도 메가레인저1(2000.2)

메가레인저들은 평소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생활을 하다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손목에 차는 시계 모양 장치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메가레인져 액션!”을 외치면서 초능력 인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는 흉측한 외계 괴물들과 슉슉슉 신나게 결투….!

드디어 그렇게 졸라대던 메가레인져 시계를 사준 날, 손목에 차기가 무섭게…

[뜽이] : 띠리리리(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입으로 흉내), 메가레인저 액션 출발!

잠잠해 있더니 볼멘소리로…

[뜽이] : 엄마, 그런데 왜 나 안 변해?


나도 메가레인저2(2000.2)

메가레인저들은 괴물들과 싸우다가 허공을 수십 미터를 날아가 떨어져도 멀쩡하게 일어나 다시 용감하게 싸운다. 까짓 거 나도 메가레인전데, 뭐!

애들 방에서 쿵 소리가 났는데 잠깐 동안 아무 소리도 안 나다가, 갑자기 뜽이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가 봤더니, 뜽이가 요 위에 큰 대자로 배를 깔고 누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오만상으로 울고 있었다.

메가레인저 흉내 낸다고, 피아노 위에서 뛰어내렸단다. 그것도 배치기로….! 그나마 요라도 깔고 했으니 다행이랄 밖에….!


이젠 허준(2000.4)

TV 역사드라마 '허준'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허준은 늘 바르고, 점잖으며, 예의 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이다. 생각이나 말투, 행동거지 모든 것이 그렇다.

어느 날 뜽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세수에 양치질까지 하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 엄마 앞으로 다가오더니, 팔짱을 끼고 서서 나 보라는 듯이 짝다리를 건들건들 흔들면서…..!

[뜽이] : 엄마, 나 혼자서 세수하고 이 닦았다!

[엄마] : 어이구, 우리 뜽이 너무너무 착하구나. 혼자 알아서 세수도 하구 이도 닦았어! 그런데, 뜽이 너 왜 그렇게 폼을 잡냐?

[뜽이] : 헙! 나, 허준이잖아!!


아무거나 이어서...! (2002.8)

3글자 끝 말 잇기 놀이다.

[아빠] : 금붕어

[딸이] : 어금니

[엄마] : 니스칠

[뜽이] : 니스팔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다.(2002.9)

[뜽이] : 엄마, 그리스로 마시나 어디에 있어?

[엄마] : 뜽아, 그리스로 맛이나 라는 게 뭐니?

[뜽이] : 에이, 엄마 누나가 보는 만화책 그리스로 마시나 있잖아. 그것도 몰라!


웬 겸양?(2002.9)

미술학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은 지 물어보셨단다. 대통령, 임금님, 장군, 왕자, 공주 등등등 아이들이 하나씩 말했다. 우뜽이 차례가 되었는데….

[뜽이] : 신하요!

[쌤님] : 어머, 우리 뜽이는 왜 신하가 되고 싶을까?

[뜽이] : 그리스로마 신하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거기에는 날개 달린 말도 나오구요, 괴물도 나오구요…!


오늘 또 오오늘(2002.9)

장난감 권총이 고장이 나서, 아빠가 새 걸로 사주셨다.

[뜽이] : 엄마, 근데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엄마] : 왜?

[뜽이] : 총이 오늘은 새 총인데, 내일이 되면 헌 총이 되잖아! 맨날 맨날 오늘만 있으면 좋겠다. 그치 엄마?


뻔뻔!(2003.3)

뜽이가 학교에서 쉬야 사고를 쳤다. 아빠가 저녁에 퇴근했을 때다.

[아빠] : 너 학교에서 오줌 쌌다면서..?

[뜽이] : 아빠는 한 살 때 오줌 안 쌌어? 엄마도, 아빠도, 다른 애들도 다 한 살 때 다 오줌 싸잖아!

[아빠] : 하하, 그게 말이 되냐! 니가 지금 한 살이야?

[뜽이] : 왜 말이 안돼? 말 돼!

[아빠] : 뜽이 너 그런데 왜 오줌 쌌냐?

[뜽이] : 애들 놀라서 기절시켜 줄라고 그랬지!


야아, 되게 신기하다! (2003.4.)

어느 날 뜬금없이,

[뜽이] : 엄마, 나 엄마 찌찌 먹으면 안 돼?

[엄마] : 안 되지! 엄마 이제는 찌찌가 안 나와.

[뜽이] : 왜 안 나와?

[엄마] : 엄마 젖은 아기가 먹어야 할 때는 나오지만, 아기가 젖을 먹지 않아도 되면 안 나오게 되거든!

고개를 꺄우뚱거리던 뜽이,

[뜽이] : 근데, 걔가 그걸 어떻게 알어?


긍적적 사고(2003.4)

일요일 저녁 집 근처 마트에 갔다. 며칠 안 남은 어버이날 선물로 딸이가 자동차 기어 레버 커버를 골랐는데 가격이 4,800원이다.

[뜽이] : 누나, 그거 내가 아빠 사 줄 거다. 나 집에 800원 있으니까, 이제 4,000원만 모으면 되거든!(누나 한테 밀릴 수 없다는 심사로...)

[엄마] : ………ㅎㄱ?

[엄마] : 쟤는 1억 원짜리 놓고도, '10만 원만 있으니까 9,990만 원만 있으면 되겠네!'라고 할 거야 아마...!(아빠에게 한 말이다)


이랬던 아이들이 이제 스물여덟 영상예술가로, 스물다섯 뮤지션으로 자라나서 각자 제 꿈들을 키우고 있다. 첫 아이가 생겼을 무렵에, 같이 일하던 사무실 선배가 해 준 말을 기억한다.


"OOO씨, 아이들을 부모가 키운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더라고요. 그냥 아이들은 스스로 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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