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자썰40] 邸, 길고 높은 담을 헐다.

껍데기 아닌 근본으로 지은 집

by 우공지마

邸(집 저): 氐(근본 저) + 邑(= 阝, 마을 읍) 주 1)


邸(집 저)는 마을(邑) 언덕 위에 있는 큰 집(底)이다. 氐(근본 저)는, 산비탈을 타고 지면(丶 = 一)에 떨어져 쌓인 흙더미(氏)다. 그 흙들이 쌓인 언덕 위에 긴 담을 쌓고 큰 집(广(집 엄))을 지으니, 그 집이 底(저)다. 그 집의 주인은 농사나 사냥으로 취로(就勞)하지 않으며,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유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할라치면 굳이 마을에 동 떨어진 언덕 위에 기거를 할 이유가 없다. 주 2, 3, 4)


이렇게 마을 언덕 위에 높이 솟은 커다란 집을 가리키려니, '底+邑'라 표시해야 할텐데, 너무 길고 복잡하여 쓰기에 편하도록 좌우를 조금씩 리모델링하니 비로소 邸(집 저)가 만들어진다.


요즘 관저(官邸)니 사저(私邸)니 해서 세간에 도는 말들이 시끄럽다. 자고로 邸(집 저)라 불리는 집은 그 규모와 화려함은 기본이다. 유력자의 권위와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경호와 영빈(迎賓)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적지 않다.

베트남 국부 호치민이 11년간 거주한 관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큰 집에서 살기 싫다'하시는 분이 계시니 그 의미가 심상치가 않다. 지도자가 검약에 솔선하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집에 담을 낮추어 긴밀히 소통하겠다는데 그것은 박수받을 만하지 않은가! 왈가왈부 말고 하시게 놔두고 그 실천이 관건이니 말씀대로 잘하시는지 지켜보면 될 일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미공개라서 알 수는 없지만, 취지대로라면 그 새 집 크기는 좀 작아지지 싶다. 어쩌면 관저(官邸)라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주인된 이가 대인((大人)이라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집의 외형이 좀 모자라더라도 그 주인이 훌륭하면 그것이 더 빛이 나는 관저(官邸)일 수 있으니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사저(私邸)는, 관저에서 머물던 유력자가 퇴임 전후에 지내는 집을 가리킨다. 관저처럼 이 역시도 집의 크기와 상관이 없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전임 대통령 두 분이 새로운 사저에서 사시게 되었다. 그 크기에 불구하고 두 분 모두 각자의 사저(私邸)에서 평안하시고,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시기를 기원한다. 혹여라도 사시는 집에 붙인 邸(집 저) 자가 무색하지 않도록…!


사족, 성북동 산 밑을 가로지르는 대사관로를 따라서 고급주택들이 즐비하다. 그 집들은 보통 저택(邸宅)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쓰인 邸는 형용사다. 즉, 관저나 사저를 흉내 내서 크게 지은 집이라는 뜻이다. 같은 저(邸)라도 그 용도가 다르다. 그러나, 요즘은 돈도 권력이니 굳이 말 돌리지 말고 호저(豪邸)라 당당하게 부르도록 해 주는 것도 사리에 맞지 싶다. 豪(호걸 호)는 귀족, 사치스러움, 우두머리, 지방에 유력자 등의 뜻으로 쓰인다.


사족 하나 더, 관사(官舍)라는 말이 있다. 고위직이 아닌 일반 공직자가 임기 중에 기거하는 집이다. 舍(집 사) 자는 원래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구조물의 상형인데, 언제든 이동할 수 있는 간소한 집을 가리킨다. 그래서, 기숙사(寄宿舍), 막사(幕舍), 객사(客舍), 청사(廳舍), 역사(驛舍), 교사(校舍)와 같이 일정한 목적으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떠나는 숙소 또는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개방된 공공시설의 개념으로 많이 쓰인다.


글자로만 보면 개방적이고 자유스럽다는 의미가 생생히 살아있다. 간소하고 개방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공간, 그런 의미에서 관저보다 관사는 훨씬 민주적이고 친화적이다. 차제에 관저라는 말을 폐하고 관사로 통일해 불러 봄은 어떨까?! 탈권위주의에 적합하다. 대통령 관사, 총리 관사, 지사 관사, 어감도 그리 나쁘지 않다.


邸에서 원래 있던 广을 없앤 이유를 이제 알듯 하다. 그것은, 집 따위 껍데기(广)에 관심 두지 말고 근본(氐)으로 돌아가서 백성을 내리 보살피는(阝) 일에 진심인 리더가 머물 수 있는 집이 저(邸)라는 뜻을 보이기 위함인 것 같다. 哈哈。


주) 1. 阝이 우부 변일 때는 邑(마을 읍)을 뜻하고, 좌부 변일 때는 阜(언덕 부)를 뜻한다..

2. 氐의 밑부분은 一과 丶을 혼용하고 의미에 차이가 없다.

3. 底(밑 저)는 그 새김말이 밑이지 집으로 쓰이지 않는다. 글자 안에 섞여 있는 집이라는 의미 요소를 빌어 온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4. 广(집 엄)은 긴 담장이 쳐진 큰 집을 나타내는데, 왼편에 완만하게 굽은 사선이 그 담장을 나타낸다.


p.s. 다음 한자썰은 每(매양 매)입니다.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