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고령창구 대상자

나, 설악산도 갔다 왔는데

by 김광희

내가 사는 남쪽에서 북쪽인 강원도까진 7시간 정도가 걸렸다.

동네 시장을 담아 온 듯한 음식 재료들이 가득 찬 자동차 조수석과 뒷좌석에 여자 셋. 운전석엔 고등학교 선생님인 J의 남편. 이렇게 넷이 강릉에 있는 대관령 자연 휴양림으로 달렸다.

그곳에서 3박 후 인제군 하추자연휴양림에서 2박.

곰배령, 두타산, 동해 추암 촛대바위, 오대산, 설악산, 한계령까지. 여러 도시를 들락날락했다. 난 그들 뒤를 징징거리지 않고 잘 따랐다. 무거운 차 트렁크를 째려보는 자동차 앞바퀴와 뒷바퀴도 쓰다듬어 줬다.

새처럼 떠들어대는 여자들. 묵묵히 흔들리지 않고 운전대를 잡은 J의 남편. 난 60대의 저력(底力)을 보여주며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온 난 피곤도 잊은 채 동네 극장을 찾았다. 킬러가 직업인 60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문구에 홀려 '파과'를 보러 갔다. 흠이 있는 과일을 뜻한다는 破果. 왠지 나이 들어가는 나를 뜻하는 것도 같았다.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죽이는 '신성 방역'의 직원인 그녀 이름은 '조각'이다.

사람에 대한 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그녀는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는 킬러 계의 전설이다.

챙길 것을 세상에 만들지 말아야 하는 원칙을 고수하던 그녀도 나이와 함께 조금씩 무너졌다. 속절없이 꺾어지는 무릎과 손 떨림. 그러나 그녀는 자기 일을 완벽하게 소화하려 매일 산속을 달리며 체력 관리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깔끔하게 제 일을 해내고야 마는 그녀의 모습이 통쾌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관리한답시고 발 뒤꿈치를 든 채 팔을 열심히 흔들었다. 킬러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60대인데…


허리를 돌리고 있는데 국세청에서 모바일 안내장이 왔다. 6월 2일까지 홈택스를 통해 종합소득세를 확인하고 신고하란다. 가슴이 쿵 했다. 연금을 받는 나에게 무엇을 신고하라는 건지.

안내문을 꼼꼼히 읽어봤다. 2024년도에 1개 근무지에서 받은 근로소득과 연금소득이 있단다.

2월 말 퇴직이니 1, 2월 월급을 받았고, 3월부턴 연금을 받았으니 맞는 말이다.

한글로 된 문서를 읽으면서도 마치 외국어를 읽은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일단 홈택스에 접속했다. 접속자가 많아서인지 연결까진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국세청 자료가 나에게 오고 싶지 않다며 반항했다.

12시 30분 점심 약속이 있던 난 서둘러 세무서로 달렸다.

세무서 안에 들어서니 도로에서 봤던 색깔 유도선이 안내한다. 난 핑크색을 따라갔다. 입구에서 신분증 확인을 하더니 오른쪽으로 가란다. 대기 번호표를 뽑았다. 고령 창구 77번이라고 쓰여있다.

내가 고령이라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난 대기실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늙은이로서 썩 많은 나이 또는 그런 나이가 된 사람을 일컫는 단어 고령(高齡).

목이 막혔다. 난 가방에 든 생수 500cc를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주변을 둘러봤다. 왼손에 번호표를 들고 자기 번호가 불리길 기다리고 있는 분들로 꽉 찼다. 민원 창구에서 66번을 부른다. 빨간 야구모자를 쓴 분이 번호표를 흔들며 창구 앞으로 간다. 그래도 내 앞엔 10명이 남았다. 점심시간이 12시부터라는데. 내 순번까지 오려나.

열린 창문으로 바람과 함께 비가 튕겨 들어왔다. 창 가까이 앉아 있던 난 힘차게 일어났다. 오른손으로 창문을 닫았다. 힘든 일이지만 아직은 쉽게 한다는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고령 단어와 고령자, 민원인, 직원들이 뒤섞인 종합소득세 신고 센터가 요란했다. 사람들 목소리와 더 거세진 빗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이제 75번. 난 고령 창구라고 찍힌 내 번호표를 봤다.

대중교통에 있는 '노약자석'처럼 배려하는 마음으로 썼을 단어가 목에 걸린다.

말하기 전 머리, 가슴을 거쳐 입으로 가야 하듯.

글로 쓰기 전에도 한 번쯤 가슴을 거쳤라면. 고령이란 단어에 이렇게 캑캑거리지 않았을 건데.


일을 마치고 세무서를 나서기 전 나는 입구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이마에 주름 몇 개와 귀 옆 흰머리가 보였다.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렸다. 안경테 아래로 흰머리를 살짝 밀어 넣어 숨겼다. 불뚝 앞으로 나서는 뱃살이 출렁했다. 낀 상의를 살짝 흔들었다


5월 꽃들을 위한 비가 춤을 추듯 흔들거리며 계속 내리고 있다. 난 우산을 쓰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등 뒤를 따라오는 단어가 자꾸 내 발목을 잡았다. 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세무서 현판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성질난다는 표를 내려 입도 앞으로 내밀었다.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거만하게 뒤로 젖혔다.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에 묻힐까 봐 손나발을 한 채 외쳤다.

'나, 설악산도 다녀온 사람인데. 고령이라니. 쫌 거시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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