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같이 시소 탈래요.
이틀 동안 전기 펌프로 물을 퍼내듯이 세상이 요란했다. 벌써 장마철인가 싶어 세탁실에 있던 제습기를 찾았다. 덮개용으로 덮어둔 비닐을 벗겼다. 전체 베이지색을 감싸던 L자 모양 빨간 색깔이 변색한 채 얼굴을 내민다. 10년 넘도록 집안 물이란 물을 먹고 또 먹었으니 색깔 정도는 변하겠지. 기능만 여전하면 괜찮아. 난 오른손으로 13L 기기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언제 비가 왔냐며 붉은 해가 솟아있다. 눈이 부신 난 얼굴을 찡그리며 제습기를 한쪽에 뒀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안경 렌즈 색깔이 바뀌었다. 선글라스와 맑은 하늘이 외출해야 한다며 날 부추겼다. 어디로 갈까? 누구를 불러낼까? 눈동자를 굴렸다.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작년 이맘땐 카페나 도서관으로 달렸는데.
여기저기 여행, 지인 농막에서 새소리 들으며 두런두런, 퇴직자 그리고 친구들과의 모임 등등으로 한동안 잊고 지냈다. 특히 도서관은 인터넷으로 희망도서 신청만 하고 대출하러 가지도 않았다.
브런치스토리 작가님들의 출간 소식이 자주 들리는 요즘. 그 기운이 있을 것 같은 도서관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서너 페이지만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책과 커피를 들고 공동현관을 나섰다. 아파트 숲길 쪽으로 가는 계단에 올라섰다. 운동화 속 발바닥에 닿는 묵직한 돌계단 감촉이 햇살을 받아 따뜻했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도 향기를 품었다. 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내 코를 건드리는 바깥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어제까지도 선거 홍보하는 소리로 시끄럽던 주변이 조용했다.
5월 날씨에 취해 부풀어 오른 가슴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귀와 코를 자극하던 것들은 어디로 사라졌지. 주변을 둘러봤다.
퇴직 전 주말이면 커피와 책을 들고 자주 들렸던 긴 의자만 보였다.
경로당과 어린이집이 있는 건물 뒤쪽 숲 속에 있는 의자다. 책 읽는 시간보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더 많이 바라봤었는데. 퇴직 후엔 잊고 지냈다. 난 도서관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이파리 몇 개와 먼지가 보이는 의자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놀이터를 바라봤다. 아이들 없는 공간이 늦가을처럼 허전했다.
이곳으로 이사했던 그해 6월. 퇴근하자마자 내 취향대로 집 안 정리를 했다. 새집에 맞게 바꾼 살림살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제 자리를 잡아가는 시간이 즐거웠다.
출근할 때면 화분이나 빈방을 바라보며 다녀온다는 말을 남겼다. 퇴근 후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면서 다녀왔다는 말도 했다. 남편 보내고 5번의 이사 후 갖게 된 깔끔하게 정리된 새집을 자랑하는 행동이었다.
혼잣말도 하루 이틀이지. 심심하고 지루해졌다. 아니, 새집에서 우두커니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바닥을 뒹구는 잎사귀 같았다. 눈을 돌려 거실 창가에 붙어 밖을 봤다. 앞 동과 동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차량 행렬. 그리고 아이들이 없는 불 켜진 놀이터. 아무도 없는 환한 놀이터가 창가에 붙어있는 내 모습 같아 울컥했다. 그날부터였나 보다.
저녁 8시쯤 놀이터를 찾았다. 그네를 탔다. 발을 굴러 위로 올라가면 나무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던 하늘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 덕분에 별은 가끔 봤다. 달과는 가까웠다. 한 손을 앞으로 뻗어 반갑다고 흔들었다.
모래를 끌어모아 집을 만들었다. 입술만 벙긋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두껍아 두껍아 새집 줄게 헌 집 다오.’ 세지 못할 만큼 모래성을 쌓고 허물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소는 한쪽에만 앉아봤다. 한 달 가까이 놀이터를 뱅글뱅글 돌며 놀았다.
퇴근 후 저녁마다 찾았던 놀이터가 바삭거리던 나를 다시 싱싱한 활어로 만들었다. 다음날이면 팔딱거리며 기운차게 출근했다. 얼굴 가득 미소는 덤이었고.
저녁 외출을 멈출 때까지 완전체로 타고 싶었던 시소는 끝끝내 즐기지 못했다.
하염없이 놀이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등 뒤 열려있는 창문 쪽이다. 할머니 두 분이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난 창 가까이 다가갔다. 앞치마를 입고 계셨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들어오라고. 거기서 혼자 뭐 해. 청승스럽게. 들어와 우리랑 점심 먹게.”
난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밥 먹고 우리랑 화투 한번 쳐주면 돼. 사람이 부족해서 그래.”
요즘 쿼클에 빠진 호모 루덴스를 알아보신 거다. 아님 ‘그렇게 혼자 앉아 있지 말고. 같이 놀아’ 던 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두 분께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감사하지만, 점심은 이미 먹었고. 요즘 쿼클에 빠져있지만, 아직 화투까진 섭렵 못 했다.'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펼치다 만 책과 뚜껑 열린 컵을 닫고 인사했다. 난 감히 대답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도서관으로 달렸다.
‘오늘 저는 청승까진 아니고, 조금 쓸쓸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다정하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리는 내 뒤로 아는 척도 하지 않은 그네, 시소, 미끄럼틀. 모래밭이 야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