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시나무처럼

홍가시나무 <네이버 무료이미지에서 퍼옴>

by 김광희

장수로 귀촌 한 친구가 보냉 가방에 싸 온 채소들을 펼쳤다. 벌써 삼 일째인데도 싱싱하다. 친구 부부의 따스한 손길과 아침이슬을 먹고 자라 건강함을 뽐내는 초록 이파리들을 씻었다. 넓적한 그릇에 담았다. 그릇 속에 담긴 채소들이 내 친구처럼 환 미소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난 친구가 알려준 대로 들기름 한 숟갈을 넣어 버무렸다. 고소한 냄새에 손보다 입이 먼저 나서려 한다.

꽃무늬 가득한 식탁 매트 위에 샐러드와 빵, 커피를 올렸다. 라디오 볼륨을 올리고 의자에 앉았다. 식탁 가까이 의자를 당기는데 부엌 바닥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참을성 없이 벌써 빵 위로 올라선 손을 데리고 바닥을 살폈다. 나사못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난 아일랜드 식탁 아래를 살폈다. 나사못이 필요한 부분이 없다. 식탁 의자를 뒤집어 봤다. 내가 앉았던 의자에 훤한 구멍이 보였다. 상판과 다리를 연결하는 8개 나사못 중 1개가 빠진 거다.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를 삼키며 서랍에서 십자드라이버를 가져왔다. 나사못을 제자리에 넣고 돌렸다. 헛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식탁 의자는 상앗빛 식탁과 어울리는 밝은 갈색 2개와 상판이 늦봄과 초여름 사이쯤일 담녹색. 그리고 진한 갈색. 이렇게 4개다. 거실 창을 바라보며 앉는 걸 좋아하는 난 담녹색 의자에 매일 나를 맡겼다.


나사못을 토해내기 전에 흔들림으로 신호를 보냈을 건데. 눈치채지 못하고 날마다 사용한 내 탓이다. 미안한 마음에 난 의자를 쓰다듬으며 나사못을 다시 죄어봤다. 여전히 헛돌았다.

안경을 벗고 눈에 힘을 준 채 찬찬히 들여다봤다. 못이 들어가야 할 구멍이 헐거워진 상태다. 난 식탁 한쪽에 있는 사각 티슈 한 장을 뽑았다. 나사못에 화장지로 옷을 입혔다. 두툼해진 못을 빠진 곳에 넣고 십자드라이버로 돌렸다. 나사못이 단단하게 조여지며 의자 상판과 다리를 이어줬다.


뒤집었던 의자를 다시 원상태로 돌렸다. 나머지 3개 의자 나사못도 점검했다. 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들기름이 감싼 채소는 번지르르했다. 미지근해진 커피 맛은 쌉싸름했다. 대신 단맛에 흠뻑 젖은 빵이 내 혀를 간지럽힌다. 거실로 뻗어 들어온 햇살까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시간이다.


나른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데, 라디오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가 곧 있을 예정이라는 속보가 들렸다.


광장을 꽉 채웠던 깃발, 피켓, 응원봉, 촛불. 그리고 많은 사람들.

그곳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난 박완서 작가의 『모독』을 손에 들고 공포와 추위에 몸서리쳤었는데.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4월 4일. 우리 모두의 함성에 대한 답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우리의 혹독했던 지난겨울은 갔다. 이제 따스한 봄이 아니, 뜨거운 여름이 오고 있다.


불구덩이 같은 더위가 오기 전. 서로의 광장이 달랐던 당신과 내가 빨강과 파랑이 섞인 ‘홍가시(레드로빈) 나무’처럼. 싸늘한 손을 맞잡고 둥근 세상을 같이 걸어간다면. 4월 중순쯤부터 피기 시작한다는 홍가시나무 꽃처럼 우리들 삶에도 온갖 색깔의 꽃들이 피지 않을까. 그곳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여유 정도는 덤이고.


난 라디오를 껐다. 식탁 위에 아직 남아있는 것들을 마저 먹었다. 지금 나에겐 먹는 게 우선이니깐. 빵을 씹으며 의자 상판에 얹힌 엉덩이를 살짝 흔들었다. 상체가 좌우 양쪽으로 박자를 맞춘다. 의자는 움직임 없이 그대로다. 이젠 헐거움이 찾아들기 전에 조이고 살펴야겠다.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고 평온함을 줄 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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