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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J가 갓김치와 다섯 살 된 손자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왔다. 낯선 사람을 만나서인지 할머니 등 뒤에 숨은 손자 준이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 않았다. 난 책꽂이에 있던 장난감 소형차들을 가져와 내밀었다. 할머니 등 뒤에서 옆으로 자리를 옮긴 녀석의 눈이 반짝거렸다. 준이는 일곱 색깔의 자동차 중 노란색을 집어 든 후 거실로 들어왔다.
햇살 가득한 거실로 J와 준이가 들어서니 창가가 흔들렸다. 식물들이 손님을 반긴다며 각각의 잎들을 앞으로 내밀며 다퉈서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J가 들고 온 익은 갓김치 냄새에 홀려 둘을 식탁 의자에 앉혔다.
손이 바빠졌다. 김치통에서 갓김치를 조금 덜어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렸다. 밥주걱으로 밥을 펐다. 아직 매운 음식은 못 먹는다는 준이에겐 달걀 프라이에 간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줬다.
준이에게 ‘떠먹여 줄까?’ 했더니 ‘아가 동생이 있는 형아’라는 말을 야무지게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난 ‘맞아. 형이지. 맛있게 먹어.’라며 작은 숟가락을 줬다.
늘 혼자 앉던 식탁에 셋이 앉았다. 갓김치 하나뿐인데도 식탁이 꽉 찼다. 친구와 난 별말 없이 이제 막 한 뜨끈한 밥을 한 숟갈 떠 갓김치를 올렸다. 밥과 김치를 씹는 사이사이 손자 육아가 버겁다는 친구의 한숨이 식탁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밥을 먹다 말고 오른손을 뻗어 친구의 한숨을 집었다. 둘이 나누면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깐.
우린 입안을 맴도는 김치 맛이 아쉬웠지만, 밥 한 그릇에 만족했다. 손 빠른 J는 내가 냉장고를 정리하는 사이 설거지를 마쳤다.
커피 원두를 가는 내 등 뒤에서 J와 준이가 그들만의 세상에서 통하는 언어로 대화했다. 대충 느낌으로 알아들은 내용은 이랬다.
‘여기는 할머니 친구 집이야. 언제 어린이집에서 만났어? 할머니 친구는 싸움 잘해?’
‘착한 우리 준이 밥도 잘 먹고. 우구구. 이쁜 새끼. 잘했어요. 싸움? 할머니보다 저 할머니가 싸움 잘해. 그니까 얌전하게 말 잘 들어야 해.’
커피 분쇄기 소리와 낮잠을 부르는 자장가 같은 J 말투. 그리고 애교로 무장한 준이 목소리가 섞였다. 난 ‘마치 드라마처럼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은 저녁 식탁 같아 포근하다.’라고 했다.
J가 고개를 흔들었다.
“넌 그렇게 안 살아봐서 몰라. 식구 많은 게 얼마나 힘든데. 아들 둘 장가만 보내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젠 손자에 삼식이 남편까지 키운다. 어이구. 내 팔자야.”
J와 난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 짝꿍이었다. 그땐 고등학교 입학시험 중 하나가 체력장이었다. 3학년 초부터 매일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서 체력장 연습을 했다. 앞으로 굽히기, 오래 달리기, 오래 매달리기, 100미터 달리기, 멀리뛰기 등 종목이 꽤 많았다.
만점인 20점을 위해 J와 나도 날마다 앞으로 굽히고, 매달리고 달렸다. 연습을 마치고 종목별 점수를 합해보면 우리 둘은 아슬아슬하게 갈렸다. 100미터 달리기 점수 때문이었다. 난 15~6초 정도였는데 J는 거의 25~6초로 우리 반 꼴등이었다. 학급별로 경쟁도 심했던 시절이라 만점이 안되면 담임선생님 매를 피하지 못했다.
때린다고 달리기 실력이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들은 우릴 때렸다. 아니 J와 친구 몇 명이 맞았다.
도저히 나아지지 않은 J가 답답했던 담임선생님은 우리 둘에게 이렇게 외치곤 했다.
“앞서가는 토끼야! 너만 달리지 말고 제발 거북이 좀 데리고 달려 봐.”
그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J와 난 토끼와 거북이로 불렸다.
잊고 있던 중3 때 별명이 나오자마자 J는 층간 소음을 유발하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인공 무릎 관절 수술 후 손자 육아와 살림이 너무나도 버겁다는 J는 중3 때 소녀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J의 웃음은 가을바람처럼 시원했다. 변하지 않은 웃음과 갓김치에 대한 칭찬을 하며 우린 수다를 이어갔다.
그때, 식탁 의자에서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던 준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릎 아픈 J를 위해 내가 의자에서 얼른 일어서는데. J가 앉았던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거북이 J가 토끼인 나를 제치고 준이 목소리가 들리는 작은방으로 먼저 날았다. 마치 제일 빠르고 힘센 태풍이 몰아치듯이 눈 깜짝할 사이였다.
준이는 키보다 높이 있던 연필깎이를 내리려다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방바닥에 깔린 러그 덕분에 다치진 않았다. 우는 준이 보다 J가 더 우는 모습이었다.
난 그런 J 모습이 우스웠다. 웃는 나를 째려보는 J가 귀엽기도 해 놀리듯이 말했다.
“손자 토끼가 우니깐 우리 거북이가 엄청 빨리 달리네. 놀랍다. 그때 그렇게 달렸음 매를 벌지 않았을 건데. 아깝다. 그지. 흐흐흐”
얼굴을 잔뜩 찡그린 J가 대답했다.
“가시내. 니도 손자 키워봐. 넌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빨리 달릴 거다.”
우린 해가 질 무렵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J는 잠투정하는 손자를 뒷좌석 어린이 시트에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한 후 자동차 앞에 서있는 나에게 말했다.
"너 알지. 너가 울면 내가 너보다 더 빨리 달려오는 거. 그러니 울지 말고 밥도 잘 챙겨 먹어."
"가시내. 난 니가 울면 바로 날아가는 거 알지. 무릎 보호 잘하고. 너도 잘 챙겨 먹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으로 들어가려던 J가 다시 날 바라봤다.
"다음엔 같이 시소 타자. 이제 놀이터는 혼자 가지 마."
느림보 거북이가 어린 토끼를 태우고 가면서 늙은 토끼를 기어이 울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