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와 장미 그리고 술래
식당에서 집까지 50분 정도 걸으면 될 것 같아 택시를 잡지 않았다. 닭구이와 아삭거리는 오이를 쌈장에 찍어 맥주 500CC까지 마셨더니 알딸딸하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배부름에 소화도 시킬 겸 환한 가로등과 손을 잡고 걸었다. 길가를 따라 활짝 핀 빨간 장미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장미, 장미 한 송이.’를 흥얼거리며 걸음 속도를 올렸다.
왕복 4차선 도로 곁을 지키는 식자재 마트, 골프장, 체육관, 병원 등을 지났다. 이대로 인도를 쭉 따라가면 내가 사는 아파트 후문이 나온다.
줄 맞춰 있던 건물들을 지나자, 공터가 나왔다. 정자와 물웅덩이가 있다. 정자 기와지붕 끝을 서성거리는 달빛을 따라 정자 쪽으로 걸었다.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 손전등을 켰다. 소리를 찾았다. 여기저기 비췄더니 소리가 멈췄다. 연꽃잎들과 물이 섞인 웅덩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파리 사이사이를 살피는데. 이파리 뒤에 숨어있던 개구리 한 마리가 어두운 곳으로 팔딱 뛰어 숨어버린다.
빠른 손놀림으로 개구리 등을 쫓았지만, 놓쳤다. 납작 엎드린 채 숨어버린 개구리 덕분에 나는 술래가 되었다.
오래전 내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어있을 때 나를 찾던 술래들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기지개를 켜며 숨을 몰아쉬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특히 '오이'와 '장미'가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5월 2일에 태어난 팔과 다리, 키까지 길쭉했던 딸은 신생아실에서 ‘오이’라고 불렸다. 오이처럼 풋풋하게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가끔은 그렇게 불렀다.
딸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1월. 남편이 떠나고 나는 잠만 잤다. ‘죽음’이란 게 뭔지 모르던 아이는 잠만 자는 엄마가 아픈 거로 생각했다. 이런 나와 딸에게 같은 통로에 살던 친구가 날마다 음식을 들고 왔다. 딸은 식탁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퇴근하지 않은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혼자 잠들었다. 나는 종일 자고 또 자도 눈을 뜨지 못했다. 도대체 며칠이나 지났는지 기억도 없던 어느 날. 내 머리 옆에 쪽지가 있었다. 또박또박 연필로 써 내려간 딸아이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 쪽지 한 장이 내 가슴을 심하게 때렸다.
나는 그날 닫았던 서랍을 힘겹게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술래였던 딸의 손을 잡았다.
<그때부터 나와 함께하는 쪽지>
나는 정자 위로 올라갔다. 난간에 앉았다. 개구리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물웅덩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살펴봤다. 기분이 좋으면 더 크게 울어댄다는 개구리는 술래인 나를 놀리듯이 모습을 숨긴 채 소리만 질렀다.
마치 그해 봄. 장미가 교실에서 복도로 뛰어나가면서 소리를 지르듯이.
남편 떠난 다음 해 나는 학교에 재취업했다. 장미는 그곳에서 내가 두 번째로 맞이한 신입생이었다.
그해 4월. 교감 선생님 지시로 여학생 특별 지도를 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땐 학생 인권보다 학교 교칙이 우선인 세상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드럼 채를 들고 여학생들이 모인 도서실로 갔다. 교칙을 설명한 후 등교할 땐 단정한 검은 핀 만 허용된다고 했다. 몇몇 아이들이 소리 지르긴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양각색이던 여학생들 핀을 검은 머리핀으로 교환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상식 이하의 일이다. 애들 말로 웃기는 짬뽕 같은 거였다.
학생부 여선생님과 둘이 교실을 돌아다니는데 1학년 여학생 한 명이 뒷문을 힘차게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곤 복도 양쪽에 교실이 있는 중복도(中複道)를, 스카이콩콩을 하듯이 빠른 걸음으로 뛰었다.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수업 중이던 교실 여기저기에서 문이 열렸다. 남학생 몇몇이 복도로 나오기도 했다. 나는 찰랑거리며 걷는 듯 뛰는 아이 뒤통수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어느새 30년이 되었다.
대학 입학으로 딸이 집을 떠난 후 나는 다시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런 나에게 장미는 술래가 되어 전화, 문자를 수시로 보냈다. 답하지 않으면 빚쟁이처럼 나를 볶았다. 워킹맘인 장미는 나를 마치 딸인 듯 한동안 관리하며 지켜줬다. 간간이 ‘제가 쌤 결혼 추진 위원장입니다.’라며 나를 놀리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걸을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에 목이 긴 장화만 남기고 빠져나왔다. 우린 스승과 제자에서 애틋한 친구 같은 가족이 되었다.
퇴직하기 전 장미는 '쌤 퇴직 후 맥줏값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며 각서를 썼다. 장난 반 진실 반이었던 게 2년째 진행 중이다.
나는 정자에서 내려와 집을 향해 다시 걸었다. 등 뒤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발도 맞췄다. 아파트 숲이 보였다. 저 모퉁이만 돌면 머리를 흔들며 나를 반기는 식물들이 기다리는 우리 집이다. 걸어오는 동안 턱밑까지 차오르던 배부름이 사라졌다. 후문 옆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간식 좀 사야겠다. 뱃살이 두둑해지든 말든.
'이파리들 사이로'를 마치며
게으른 손가락과 미숙한 가슴으로 30회까지 왔다. 브런치 작가님들과 매주 잊지 않고 들려주는 독자님들의 응원이 있어 가능했다. 특히 끊임없이 실타래를 풀 듯 글을 써내는 작가님들께는 '존경합니다.'란 인사를 드린다. 미숙아처럼 인큐베이터로 뛰어들고 싶은 적도 있었던 나는 부끄럽지만, 오늘 밤 나를 안고 춤을 추려한다. 지금까지 잘 버텨온 나를 칭찬하면서.
앞으로도 파티는 쭉 진행될 거다. 난 이파리들 사이로 하늘과 별을 보며 걸어갈 거고. 아울러 그동안 많은 술래가 숨어 있는 나를 햇빛 속으로 데려왔듯이 이젠 내가 술래가 되어 그들을 찾아가겠다. 부디 누군가에게 내 손끝이 닿기를. 그들에게도 내가 '오이'와 '장미'가 되기를….
<2024년 2월 퇴직한 날 바로 입금. ㅎㅎ2025년 1월엔 약간의 인상분이 포함된 금액이 입금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