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소원이 이뤄지길
Ⅰ
수술한 지 백일이 지났을 때쯤, 조금씩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지니깐 한동안 잊고 지내던 포항이 어른거렸다. 내 투병 소식에 놀랐을 친구들에게 회복 중인 모습을 보여주며 위로받고 싶기도 했다.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던 엉덩이가 바람에 날리는 종잇조각처럼 들썩거렸다. 오른쪽 발등으로 공 하나쯤은 찰 정도가 되었지만, 장거리 운전까지는 무리였다. 이런 마음을 전해 들은 막냇동생이 선뜻 데려다준다길래 나는 망설이지 않고 길을 나섰다. 동생 덕분에 1년 만에 만난 우리 셋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모래 섞인 라면을 먹던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그때 그 바닷가를 찾았다.
소형차인 티* 뒷문에서 하나, 둘, 셋넷 아이와 어른이 내렸다. 덩달아 조수석에서도 어른과 아이가 하나둘…. 차를 주차하고 해수욕장으로 걸어가려던 아저씨가 눈을 크게 뜨고 티*를 바라봤다. 아이 다섯이 아저씨 앞을 지나 왁자지껄하게 모래밭으로 뛰었다. 놀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숫자를 헤아리더니 자동차 문을 잠그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차에 몇 명이나 탄 거요?”
아이들의 엄마인 우리 셋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모래바람 속에서도 라면을 끓였다. 양은 냄비에 코를 박고 모래가 씹히는 라면을 먹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숫자를 세던 아저씨 모습이 생각나 입안에 든 라면을 삼키지도 못하고 웃었다. 우리 셋은 사춘기 소녀 같은 삼십 대 엄마이자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들꽃 같았다.
거의 매일 다섯 명의 아이와 근처 사찰, 바닷가, 공원을 누비고 다녔다. 일요일 아침이면 대중목욕탕으로 몰려가 물속에서 웃고 떠들다 오기도 했다.
그 시절엔 구름 꽉 낀 날에도 세상이 환했고 이유 없는 웃음이 늘 우리와 함께했다. 같이 밥 먹고 뒹굴며 어린이집을 다녔던 아이들은 이젠 서른을 넘긴 어른이 되었다. 그들을 돌보던 엄마들은 할머니라 불리고 있다.
모래도 소화하던 젊은 엄마에서 이젠 3년 된 암 환자(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와 개척교회 사모님. 그리고 몇 개월 된 암 환자가 된 셋. 우리는 수평선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해를 맞았다. 눈을 감고 가슴 밑바닥까지 요동치는 간절함을 담아 손을 모았다. 중얼중얼 소원을 빌었다. ‘오늘처럼 웃고 떠들며 모래밭을 뛰어다니게 해 주소서.’ 찌찌뽕! 우리 셋 마음이 통했다.
Ⅱ
이른 시간이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맨 채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삼산중학교와 부영 cc를 바라보고 있는 구름다리가 드디어 보였다. 다리 중간쯤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곳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목포 가는 도로와 발맞춰 서 있는 산이 보인다. 그 산에서 솟아오를 해를 보려고 사람들이 모인 거다. 이들은 근처 식당에서 제공 중인 신년 맞이 떡국보다는 해맞이가 먼저인 사람들이다.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이 따뜻한 물 한 잔씩을 돌리며 소리쳤다. ‘걷기가 가능하다는 건 달릴 수 있다는 겁니다. 주말에 같이 뛰어보시죠!’ 그들은 차가운 입김을 내뿜으며 제자리 뛰기를 보여줬다. 나는 장갑을 낀 채 박수를 보냈다.
서서히 하늘이 불그스름해지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나는 손을 코앞으로 모았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을 해를 오늘 아침엔 꼭 보고 싶었다.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저 멀리 산에 눈을 고정했다. 한참을 불거지기만 하고 정작 해는 나오질 않았다. 내 뒤쪽에서 사내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처럼 화장을 덜 해서 안 나오나?”
떠오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앞만 바라보던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구름다리가 떠들썩했다. 나도 소리 내 웃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 깬 해가 수줍은지 붉은 얼굴을 조금씩 내밀었다. 하늘과 산이 점점 물들어갔다. 수평선과 지평선에서 마주한 해는 변함없는데, 우리 마음이 요란했다. 겨울옷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모두 소원을 비는 모양이다. 나도 합장한 손에 눈 감은 얼굴을 갖다 댔다.
Ⅲ
수술 후 두 번째로 여수 친구 둘을 만났다. 신년 맞이 얼굴 보자는 말에 확연하게 좋아진 내 상태를 자랑하고 싶었다. 내친김에 고창 선운사로 1박 2일 여행까지 가기로 했다. 자동차 시동을 걸자마자 내가 잘난 척을 했다. 4년 만에 알게 된 내비게이션 음성 기능(포항 가는 길에 막냇동생이 음성인식으로 전화하고 길을 찾는 걸 보고서야 알게 됨) 시범을 보였다. ‘선운사 우체국 수련원’이라고 말한 뒤 안내 말에 따라 고속도로를 달렸다.
두 달 만에 만났는데도. 뭐 그리도 할 말들이 많은지. 주변 경치를 바라볼 새도 없이 우리는 목이 마르도록 이야길 했다. 고속도로 표지판에 지리산이 보였다. 이상했지만 나는 거침없이 달렸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자, 조수석 옆쪽으로 계곡이 보였다. 고창 선운사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친절한 내비게이션 음성을 따라갔다. 커브를 돌자 멀리 남원 산내 우체국 수련원이 보였다. 내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내비게이션이 이곳으로 안내를 한 거다. 글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무조건 달리다니. 직장동료에서 친구가 된 퇴직자 셋은 자동차 천장이 뚫리도록 크게 웃었다. 어리숙한 운전자를 위한 쉼을 가진 뒤 우린 다시 전북 고창군 선운사로 달렸다. 새끼줄에 매달린 깡통 같은 웃음이 자동차 배기관을 따라왔다.
그렇게 미리 가본 지리산 둘레길 3코스에 있는 남원 산내 우체국 수련원을 光 자매들이 찾았다. 내가 수술대에 누워있을 때 형부를 떠나보낸 언니를 위해 넷이 떠나는 여행이라고 날씨가 봄날처럼 따뜻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을 미리 연습한 내가 운전했다. 나는 光 자매를 잘 모시기 위해 친구들과 일주일 전 미리 답사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별한 지 사 개월로 접어든 언니를 특별하게 위로하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오래간만에 떠들썩한 소란 속에 있음이 좋은지 언니도 크게 웃었다. 그런 언니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그럼 웃어야지.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니깐. 웃다 보면 세월이 거침없이 가더라고.”
텔레비전 소리만 맴돌던 집을 벗어나 情 넘치는 자매들과 함께하니 나도 즐거웠다. 질주 본능을 뽐내던 자동차가 지리산 오도재에 도착했다. 서쪽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해넘이가 시작된 거다. 따뜻했던 낮을 던져주고 지리산 뒤로 떠나가는 해를 바라보며 光 자매가 한 줄로 섰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 때처럼 지는 해를 바라보니 저절로 손이 모아졌다. 우리는 눈을 감고 빌었다. ‘오늘처럼 늘 웃게 하소서.’
오도재에서 바라본 지리산은 여전히 푸르렀고 서쪽 하늘은 붉었다. 나는 해가 다 넘어가기 전에 光 자매를 불러 모았다. ‘자 여기를 보세요. 하나, 둘, 셋!’
해가 떴으니 지는 건 順理다. 우리도 땅을 밟고 지냈으니, 언젠가는 하늘로 떠나는 거고. 우리 넷은 지는 해를 보내며 다음 여행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