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을 보내고 2월을 맞이하다
붉은말이 적색 신호등을 무시하고 내게로 달려왔다. 나는 외면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다가 나이 한 살을 먹어버렸다. 손거울 속에 비친 늘어진 턱살, 적당하게 쓴맛과 단맛이 버무려진 퍽퍽한 주름살이 나잇값을 보여준다. 손가락, 발가락을 다 더해도 내 나이가 되기엔 많이 부족하다. 그 덕분에 나는 올해부터 국립공원 무료입장 대상자가 되었다. 이것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래도 웃어야겠지. 웃는 모습은 여전하니깐.
새해 첫날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하며 붉게 떠오르던 해 앞에서 고개 숙여 소원을 빌었는데….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이렇게 달리다 보면 지친 말(馬) 대신 기운찬 붉은 양(羊)이 내 품을 파고들 것만 같다. 삶은 나이에 맞는 속도로 달린다고 하더니 맞나 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번 오르락내리락했을 뿐인데 1월이 가다니. 내 시간은 60km를 훨씬 넘는 속도로 달렸으니 생각보다 빨랐다. 나는 한숨 대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오전 내내 들여다보고 있던 거울을 내려놓았다.
나와 한 몸 같던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 원두를 갈았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겠다면서 기껏 생각해 낸 게 커피라니. 한심했지만, ‘퇴직 자니깐. 괜찮아’라며 커피 애호가로 알려진 베토벤처럼 원두를 갈았다. 그는 커피 원두 60개를 세어 직접 빻으며 아침을 시작했다. 빻은 원두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동안 영감(靈感)을 얻어 수많은 명곡이 탄생했다고 한다. 나도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동안 아이디어가 쏙쏙 돋아난다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판을 두드리며 턱살도 주름살도 잊을 건데. 내 입에서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못 들은척하며 머그잔에 커피를 담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커피 냄새를 들이마셨다. 머릿속을 떠도는 구겨진 글들이 펴지나 싶어 잠시 기다렸다. 따뜻한 향으로도 펴지지 않는 것들만 나를 에워쌌다. 커피 향에 취한 거실이 따뜻했다. 취기가 올라 포근해진 거실에서 영화나 볼까 싶어 리모컨을 들었다. 인터넷을 뒤졌다. 영화 한 편이 눈에 띄었다. 작년에 미국 토니상을 휩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나는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시작을 눌렀다.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헬퍼봇 1세대인 올리버. 그보다 더 최신형인 클레어. 충전기가 고장 난 클레어가 올리버가 사는 아파트 문을 두드리면서 둘의 만남이 시작됐다.
주인이던 제임스가 떠난 후 올리버를 찾는 이는 오직 택배기사뿐이었다. 올리버는 종일 화분을 보살피고 재즈 음반을 들으며 ‘곧 돌아오겠다.’라며 떠난 제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헬퍼봇이 인간에게 쓸모가 없어지자, 기존 로봇들은 폐기되기 시작했고. 떠나간 제임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환경오염 운운하며 부품 생산마저 중단되었다. 올리버는 고철 더미에서 부품을 찾아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중에 클레어를 만나게 된 거다.
최신형인 클레어에게 이끌려 제임스를 찾아 집을 나서보는 올리버. 인간에게 잡히면 폐기될 둘은 인간인 척, 연인인 척하며 제임스가 있는 제주도로 향했다. 여행하는 동안 별별 일을 겪으며 둘에겐 생소한 감정이 싹텄다. 로봇에게 입력돼 있지 않은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른 채 둘은 처음 느낀 두근거림에 고통스러워한다. 어색한 감정에 힘들어하던 둘은 서로를 초기화한다.
그리고 며칠 후. 여전히 충전기가 고장인 그녀가 올리버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올리버를 본 순간 클레어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올리버. 둘은 인사를 나눈다.
“내 문을 두드려줘서 고마웠어요.”
“문을 열어줘서 고마웠어요.”
초기화됐지만 여전히 설레는 둘의 눈빛이 텔레비전 화면을 꽉 채웠다.
기계로 만든 로봇이어도 문을 열어 이웃과 외로움을 나누는 동안 서로에게 생소한 감정이 생겨버렸던 거다. 그 둘에게 생소하고 고통스러웠던 감정이 우리 집 거실만큼 따뜻하고 커피처럼 진한 사랑이라니. 그들의 끝이 진정 해피하길 응원하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옷 바지를 추켜올리며 문을 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온 차가운 바람이 내 처진 턱살과 주름 사이로 2월과 함께 들어서며 인사했다. '문을 열어줘서 고마워요.' 나는 탁상 달력을 넘기며 대답했다. '문을 두드려줘서 고마워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