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뭐라고

물소리가 이렇게까지 설렐 줄이야

by 김광희

동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책 읽기 친구와 컨테이너 농막을 갔다. 고색창연한 성당과 길거리가 눈밭인 곳을 다녀온 그녀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깥보다 더 냉랭한 공기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서려는 내 발걸음은 망설였다. 나는 조금 전 엉덩이까지 따뜻했던 자동차로 돌아가고 싶어 져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내가 못마땅했던지 등 뒤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막 구름을 제치고 길을 나서려는 햇살을 앞지른 겨울바람이 닫힌 현관문을 두드렸다.


거의 2주 만에 얼굴을 들이민 농막은 기다림에 지친 탓인지 썰렁했다. 서둘러 그녀는 바닥 전기 패널 스위치를 나는 이동식 히터를 켰다. 그래도 쌓인 먼지는 털어야 하니 안과 밖 차가운 공기가 드나들게 창문을 열었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오그라들었다. 우리 둘은 굽은 손가락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크게 웃었다. ‘그놈의 책 읽기가 뭐라고!’ 농막도 우리 둘 손가락도 냉장고 같은데….


정리를 마치고 물을 끓이려 수도꼭지를 돌렸다. 길을 열어줬는데 물이 나오질 않았다. 수도계량기를 헌 옷과 스티로폼으로 꽁꽁 싸 놓았는데 자연의 힘이 더 거셌던 거다. 우린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햇살이 제 할 일을 해 물이 곧 나올 거라 다독이며 밀린 수다를 떨었다. 발목까지 잠긴 눈길을 걸었다는 그녀의 동유럽 여행기를 들으며 빵과 고구마를 먹었다. 마실 물이 없다는 걱정도 하지 않고 우리 둘은 즐겁게 먹었다.

문을 두드렸으나 열어주지 않은 수도꼭지를 째려본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펼친 책 속 활자들이 반갑다며 춤을 췄다. 우리 둘은 책에 집중하지 않고 싱크대로 달려가는 귀를 그냥 뒀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점점 읽은 쪽수가 늘어나는데 수도꼭지에서 들리는 소식이 없다. 이대로라면 아껴둔 침까지 말라버릴 텐데.


책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 목소리가 미세먼지를 들이마신 것처럼 따가운 기침을 했다. 나는 ‘목소리가 사막처럼 뜨거워지기 전에 갈까.’라며 책에서 눈을 떼 창밖을 바라봤다. 덩달아 그녀도 말라비틀어진 풀들과 주인 모를 비닐 막이 보이는 바깥을 쳐다봤다. 제법 뜨거워진 햇살에 눈이 부신지 그녀는 실눈을 뜨며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강추위에 얼어버린 수도꼭지를 녹이기 위해 따뜻한 물을 붓던 겨울날이었다. 어린 그녀는 아침마다 언니, 오빠, 동생을 위해 커다란 솥뚜껑을 열어 뜨거운 물을 펐다. 바가지에 담긴 물을 쏟을까 봐 조심스럽게 수돗가까지 들고 가 나무막대 같은 얼음이 매달린 수도꼭지에 부었단다. 지금 내 주먹보다 더 작았을 두 손으로…. 착하기도 하지. 내가 그녀였다면 아침마다 하기 싫다고 떼를 쓰며 울었을 텐데.


그녀의 시린 추억을 따라가던 나는 친정집이 떠올랐다. 본채엔 우리 6남매와 부모님. 그리고 아래채 위채 등 무려 네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보다 훨씬 추웠을 그 겨울 우리 집 수돗물은 얼지 않았다. 그 시절엔 헌 옷도 귀했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한 겨울 몰아치는 추위에도 물을 편안하게 사용하게 했을까? 아마도 부지런한 분이라 모두 잠들어있는 새벽에 얼어있는 물줄기를 녹였으리라. 세 들어 사는 가구를 위해서가 아니고 올망졸망한 우리 6남매 때문이었을 거다.

추위에 방을 나서기도 싫었던 날. 씻기 위해 부엌 앞 수돗가에 가면 항상 큰 대야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있었다. 장작을 넣던 안방 아궁이에 걸어둔 커다란 쇠솥에 끓인 물을 아버지가 퍼다 놓았던 거다. 행여나 자식들이 뜨거운 물에 델까 봐 힘센 아버지가 직접 했다. 그 뜨거운 물로 밤새 빙판이 돼 버린 수돗가도 녹였을 거다. 자애(慈愛) 로운 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 모든 사람들은 겨우내 수도꼭지에서 쉽게 흐르는 물을 봤다. 물론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를 들고 이동하지도 않았다. 이미 고인(故人)이 되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 나는 붉어진 눈을 닦으려 안경을 벗었다.


그때였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녀와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뼉을 쳤다.

"와~아! 물이 나온다!"

그게 뭐라고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싱크대로 쫓아가며 큰 소리로 웃었다. 오랜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말라버린 우리 둘 혓바닥에도 단비가 내렸다. 드디어 따뜻한 커피와 물을 마신 우리는 시동 걸린 오토바이처럼 요란하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 매국노로만 알고 있던 이완용을 파고들다가 해 질 녘 농막을 나서기 전.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사피엔스인 우리 둘은 그곳에 있는 모든 그릇에 물을 받아두고 농막 문을 잠갔다.


집에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아이가 뛰어왔다. 유치원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는 벌겋게 달아오른 꽈배기 과자 같았다. 온몸을 배배 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덩달아 나도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내려오는 중인 엘리베이터가 답답했다. 점점 더 몸을 꼬는 아이가 안타까워 내가 물었다.

“혹시 아줌마가 좀 도와줄까? 화장실 가고 싶니?”

아이는 양손으로 바지를 꽉 잡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는 것도 같다. 27층을 누른 나보다 훨씬 아래층을 누른 아이 두 손은 바지 앞 지퍼를 움켜쥐고 있다. 이제 겨우 아이가 누른 층 절반쯤 올라왔는데 힘겹게 다리를 배배 꼬던 아이가 울었다. 아이 뒤쪽에 서 있는 내 운동화 앞으로 물이 흘러왔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며 무거운 바지를 잡은 채 내렸다.


나는 우는 아이 뒤통수와 어기적 어기적 걷는 모습이 귀여웠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입술이 씰룩거렸다. 오늘 아침 물이 나오지 않아 끙끙대던 우리 둘과 나오려는 걸 막으려다 실패한 아이의 소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물 소동이 우스웠다. 하지만, 아이 울음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아 미소를 거뒀다.

물불 가리지 못할 아직은 어린 아이니깐 아무 곳에서 나 소변을 볼 법도 한데. 애타게 화장실을 찾으며 참다니. 옳고 그름이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아이가 기특했다.

집에 도착한 나는 걸레를 챙겨 엘리베이터로 갔다. 아이 눈물 흔적을 닦아주기 위해서다. 오늘이 지나면 '그게 뭐라고! 괜찮아!'라며 힘차게 놀이터로 달려갈 아이 모습을 그려본다. 활짝 웃는 아이 모습을 생각하니 당황한 울음소리에 멈췄던 내 미소가 날개를 활짝 폈다. 혹여 엘리베이터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내가 먼저 손을 흔들며 인사하련다. '안녕! 오늘도 실컷 뛰어놀다 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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