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유치 찬란한 어르신의 아침

by 김광희

뉴스에서 오늘 밤부터 내일 새벽까지 많은 눈이 내릴 거란다. 눈이 귀한 이곳도 해당한다는 아나운서 말을 들으며 커튼을 닫던 손을 멈췄다. 창밖은 서서히 어두워지는데 나는 닫다 만 커튼을 다시 열었다. 두어 번 빗나간 일기예보 때문이다. 이번에도 내가 잠든 후에 하얀 색깔만 보여주고 그쳐버릴까 봐. 나는 눈을 부릅뜨고 기다려볼 참이다. 거실 창을 바라보며 따뜻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건너 아파트 옥상을 왔다 갔다 하는 희미한 빛이 자장가를 부르며 나를 유혹했다. 눈꺼풀이 닫히려 했다. 나는 바닥에 붙은 등을 떼내려 애를 썼다. 강력 본드도 충분히 이겨버린 쏟아지는 잠에게 나는 지고야 말았다.


거실 바닥에서 잠을 잔 나는 등이 배겨 새벽 5시쯤 눈을 떴다. 창을 열고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봤다. 아직은 조용했다. 내가 벼르고 있는 줄 아나보다. 나는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본 후 하얀 소식이 창을 두드려주길 기다리며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셨다.


시커먼 하늘을 뚫고 내려오려면 힘들 것 같아 환영식을 해주려 했다. 한데 내가 잠시 딴짓하는 사이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발효 중이니, 주의하라는 안전 문자도 같이 왔다. 아파트 광장과 놀이터에 눈이 쌓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계속 창밖을 살피던 나는 두툼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조심스럽게 하얀 세상으로 발을 디밀었다. 놀이터 가는 길에 가볍고 묵직한 내 발자국 도장을 새겼다. 걷다 뒤돌아보니 움푹 팬 내 흔적들이 보였다. 그 위로 하얀 눈이 계속 내렸다. 영하 날씨라 사각 보도블록이 곧 얼 것 같다. 나는 길옆에 세워진 싸리 빗자루를 들고 좌우로 눈을 쓸었다. 그것도 노동이라고 어깨, 손가락이 얼얼했다. 장갑 낀 손가락을 움직여 어깨를 주무르며 그네, 시소, 미끄럼틀, 철봉까지 온통 하얀색을 칠한 놀이터와 마주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심정이 이랬을까? 기쁨이 차오르는 눈을 비비며 하얗고 푹신할 것 같은 눈밭을 바라봤다. 걸어 들어가려니 가슴이 떨렸다. 가 쪽으로 슬그머니 발을 들였다. 미끄럼틀 주변으로 다가갔다. 달리기 하듯 주먹을 사뿐히 쥐고 오른발 왼발 교대로 하얀 눈과 이야기하며 걸었다. 시소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가 장갑을 벗고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눈밭에 이름을 써 내려갔다. 그 이름들을 중앙에 두고 하트를 그리다 보니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가 되었다. 장갑을 끼고 쏟아지는 눈을 뭉쳤다. 하나, 둘. 태어나 처음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하얀 세상에 내 발자국과 하트 5개, 눈사람 2개가 세워졌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겼다. 대설주의보가 맞다는 듯이 눈은 계속 내렸다.


머리, 어깨에 제법 눈이 쌓였다. 나는 눈을 털다 말고 리듬을 타듯 몸을 좌우로 손을 위아래로. 발은 앞뒤로. 눈을 감고 춤을 췄다. 이러려고 눈을 기다렸던 건 아닌데. 하얀 눈발이 내게로 다가오자 몸이 반응했다. 놀이터 기구 사이사이를 들락날락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거기서 뭐 하세요?"

작년 5월 세무서를 다녀온 후 썼던 '당신은 고령 창구 대상자' 글 이후 종종 나를 '어르신'이라고 놀리는 동네 동생이다. 요즘 근처 요양원으로 출근하는 그녀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나를 발견한 거다. 나는 반가움에 손을 힘껏 흔들며 대답했다.

"다음에 눈이 내리면 나랑 같이 놀이터에서 놀아!"

그녀는 눈 뭉치와 환한 웃음을 던지며 출근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8시가 훌쩍 넘었다. 나는 놀이터에 발자국과 하트 5개. 눈사람 2개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창을 비추는 햇살에 구겨진 얼굴로 놀이터를 내려다봤다. 언 수도꼭지 물이 멈췄듯이 해가 나오자 눈이 하늘로 달아나 선명했던 발자국들이 흐릿해지고 있다. 나는 물티슈를 들고 현관으로 갔다. 유치 찬란한 어르신이 끌고 온 흙 발자국을 닦았다. 놀이터에 두고 온 것들이 점점 녹아가고 아낌없이 뛰어놀았던 아침 시간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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