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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Nov 27. 2023

연필이 부른다

당신의 연필은 무엇입니까?

 사각사각 소리에 잠이 깼다뭔가를 갉아먹는 소리다혹시 쥐쓸고 닦기를 즐기는 내가 사는 집에 쥐라니놀라 일어나 온 집안 불을 켰다반쯤 감긴 눈으로 여기저기 살폈다식탁 쪽에서 나는 소리다식탁 위엔 노트북필기도구 그리고 갖가지 약이 있다난 무섬증으로 떨리는 몸을 꽉 껴안고 식탁 앞으로 갔다어제 퇴근길에 사 들고 온 육각형 2HB 연필이 종이를 갉아먹고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음이 심란하거나 우울하면 만 원을 들고 집을 나선다모든 물건이 다 있다는 다이소를 가기 위해서다꽃을 향해 날아가는 벌처럼 붕붕 대며 걷는다온갖 물건들과 사람 사이를 비집고 2층 문구 판매대로 간다화려한 무늬 노트비닐포장지필기도구가 있는 곳에 서면 설렌다이젠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있어 쓸 일이 별로 없는 문구들이지만 자세히 살펴본다여러 가지 색깔로 전봇대처럼 우뚝 선 연필들이 반갑다그중 글씨 쓰기에 적합한 2HB 연필을 집어 든다모양도 각양각색이다난 육각형을 좋아한다.


 연필심이 부러지면 다시 깎아야 하는 번거로움에 나는 한동안 샤프펜슬을 사용했다연필을 쥐던 엄지와 검지로 샤프펜슬을 잡으면 차가웠다꽉 찬 느낌도 아니었다연필보다 더 가늘고 딱딱한 모양 때문이다샤프펜슬 심 또한 가늘고 날카로웠다연필을 더 오래 잡은 내 엄지와 검지는 부드러운 연필심이 춤을 추듯 사각사각 내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난 연필로 돌아왔다.


 내가 여러 가지 연필 중 육각형 2HB 진노란색 하나를 선택한다병아리 같다연필을 손에 잡은 채허공에 글씨를 쓴다그리움 써 내려가는 동안 사각사각 소리가 들린다첫눈을 밟는 것 같다.     

 1970년대 초등학생이던 난 신학기인 3월에 받는 교과서 냄새가 좋았다헌책은 쿰쿰한 곰팡내가 났는데 새 책은 이제 막 인쇄한 기름 냄새가 나서였다.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아버진 달력 뒷면을 표지 삼아 꼼꼼하게 책 표지를 싸줬다하얀 책 표지 위에 도장 찍듯이 학교학년 반번호이름을 써줬다볼펜으로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아버지의 필체가 나는  좋았다연필만 쓰던 난 볼펜을 사용하면 그런 글씨체가 될 줄 알았다난 연필 대신 볼펜을 동경했다.


 교과서를 달력으로 싸는 일은 초등학교 6년 동안 반복됐다중학생이 되면서는 비닐로 된 예쁜 교과서 커버를 사용했다달력 종이 뒷면에 쓰인 아버지 글씨는 교과서 안으로 들어갔다

 필기도구도 중학생이 되면서 연필에서 편한 볼펜으로 바뀌었다더는 아침마다 마루에 앉아 연필 깎아주던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없었다나는 볼펜으로 아버지 글씨처럼 힘이 넘치게 써보려 했다계속 연습했으나 되질 않았다둥글둥글하면서 넓적한 어른스럽지 않은 글씨체 그대로였다.


 난 한번 쓰면 못 지우는 볼펜의 불편함에 다시 연필을 사용했다육각형 연필을 손에 쥐고 뭐든지 끄적였다노트 정리가 깔끔하지 않다며 선생님께 혼나기도 한 글씨였다그 글씨체를 친구들은 연애편지에 적격이라 했다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난 학생 필수품인 책가방에서 핸드백으로 가방이 바뀌었다내 핸드백엔 화장품과 필기구를 담은 필통이 있다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데도 갖고 다닌다길을 걷다 문구점이 보이거나 우울하면 연필을 산다연필깎이 칼로 연필을 깎는다연필심이 가늘어지면서 내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아버지가 어린 날 부르는 목소리다초등학생일 때 마루에 앉아 연필을 깎아주던 아버지 모습이다연필이 귀한 시절이라 연필심이 부러질까 봐 짧고 굵게 해 줬다. 그 연필을 필통에 넣고 양팔 흔들며 등교하던 시절 내 모습이 그립다그때 아버지보다 더 늙은 난 여전히 둥글둥글하고 넓적한 글씨체 그대로다.     


 어제 사 들고 온 육각형 연필이 묵혀둔 옛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날 깨운 것이다아버지 품처럼 나를 감싸 안은 연필을 잡고 식탁 의자에 앉는다내게 연필은 힘든 마음을 녹여주는 마법 같은 물건이다사각사각 하얀 종이를 갉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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