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연필은 무엇입니까?
사각사각 소리에 잠이 깼다. 뭔가를 갉아먹는 소리다. 혹시 쥐? 쓸고 닦기를 즐기는 내가 사는 집에 쥐라니. 놀라 일어나 온 집안 불을 켰다. 반쯤 감긴 눈으로 여기저기 살폈다. 식탁 쪽에서 나는 소리다. 식탁 위엔 노트북, 필기도구 그리고 갖가지 약이 있다. 난 무섬증으로 떨리는 몸을 꽉 껴안고 식탁 앞으로 갔다. 어제 퇴근길에 사 들고 온 육각형 2HB 연필이 종이를 갉아먹고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음이 심란하거나 우울하면 만 원을 들고 집을 나선다. 모든 물건이 다 있다는 다이소를 가기 위해서다. 꽃을 향해 날아가는 벌처럼 붕붕 대며 걷는다. 온갖 물건들과 사람 사이를 비집고 2층 문구 판매대로 간다. 화려한 무늬 노트, 비닐포장지, 필기도구가 있는 곳에 서면 설렌다. 이젠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있어 쓸 일이 별로 없는 문구들이지만 자세히 살펴본다. 여러 가지 색깔로 전봇대처럼 우뚝 선 연필들이 반갑다. 그중 글씨 쓰기에 적합한 2HB 연필을 집어 든다.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난 육각형을 좋아한다.
연필심이 부러지면 다시 깎아야 하는 번거로움에 나는 한동안 샤프펜슬을 사용했다. 연필을 쥐던 엄지와 검지로 샤프펜슬을 잡으면 차가웠다. 꽉 찬 느낌도 아니었다. 연필보다 더 가늘고 딱딱한 모양 때문이다. 샤프펜슬 심 또한 가늘고 날카로웠다. 연필을 더 오래 잡은 내 엄지와 검지는 부드러운 연필심이 춤을 추듯 사각사각 내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난 연필로 돌아왔다.
내가 여러 가지 연필 중 육각형 2HB 진노란색 하나를 선택한다. 병아리 같다. 연필을 손에 잡은 채, 허공에 글씨를 쓴다. 그리움 써 내려가는 동안 사각사각 소리가 들린다. 첫눈을 밟는 것 같다.
1970년대 초등학생이던 난 신학기인 3월에 받는 교과서 냄새가 좋았다. 헌책은 쿰쿰한 곰팡내가 났는데 새 책은 이제 막 인쇄한 기름 냄새가 나서였다.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 아버진 달력 뒷면을 표지 삼아 꼼꼼하게 책 표지를 싸줬다. 하얀 책 표지 위에 도장 찍듯이 학교, 학년 반, 번호, 이름을 써줬다. 볼펜으로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아버지의 필체가 나는 참 좋았다. 연필만 쓰던 난 볼펜을 사용하면 그런 글씨체가 될 줄 알았다. 난 연필 대신 볼펜을 동경했다.
교과서를 달력으로 싸는 일은 초등학교 6년 동안 반복됐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비닐로 된 예쁜 교과서 커버를 사용했다. 달력 종이 뒷면에 쓰인 아버지 글씨는 교과서 안으로 들어갔다.
필기도구도 중학생이 되면서 연필에서 편한 볼펜으로 바뀌었다. 더는 아침마다 마루에 앉아 연필 깎아주던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볼펜으로 아버지 글씨처럼 힘이 넘치게 써보려 했다. 계속 연습했으나 되질 않았다. 둥글둥글하면서 넓적한 어른스럽지 않은 글씨체 그대로였다.
난 한번 쓰면 못 지우는 볼펜의 불편함에 다시 연필을 사용했다. 육각형 연필을 손에 쥐고 뭐든지 끄적였다. 노트 정리가 깔끔하지 않다며 선생님께 혼나기도 한 글씨였다. 그 글씨체를 친구들은 연애편지에 적격이라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써주기도 했다.
난 학생 필수품인 책가방에서 핸드백으로 가방이 바뀌었다. 내 핸드백엔 화장품과 필기구를 담은 필통이 있다. 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데도 갖고 다닌다. 길을 걷다 문구점이 보이거나 우울하면 연필을 산다. 연필깎이 칼로 연필을 깎는다. 연필심이 가늘어지면서 내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가 어린 날 부르는 목소리다. 초등학생일 때 마루에 앉아 연필을 깎아주던 아버지 모습이다. 연필이 귀한 시절이라 연필심이 부러질까 봐 짧고 굵게 해 줬다. 그 연필을 필통에 넣고 양팔 흔들며 등교하던 시절 내 모습이 그립다. 그때 아버지보다 더 늙은 난 여전히 둥글둥글하고 넓적한 글씨체 그대로다.
어제 사 들고 온 육각형 연필이 묵혀둔 옛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날 깨운 것이다. 아버지 품처럼 나를 감싸 안은 연필을 잡고 식탁 의자에 앉는다. 내게 연필은 힘든 마음을 녹여주는 마법 같은 물건이다. 사각사각 하얀 종이를 갉아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