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란 단어에 울음을 삼킨 시간.
텔레비전에서 탤런트 임현식 님을 오래간만에 보았다. 살이 빠지고 머리숱이 줄어든 모습에 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을 닮아서다. 눈웃음 살살 흘리면서 약간은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하는 임현식 님 모습에 난 친정 식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버지가 텔레비전에 나온 것 같아. 빨리 봐 봐”
그 프로그램을 본 가족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맞다. 딱! 우리 아버지네. 보고 싶다. 울 아버지”
친구들은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아이고 엄마!’를 외쳤다. 난 어릴 때부터 ‘아이고 아버지!’라 했다. 아버지가 6남매 중 둘째 딸이자 순번으론 세 번째인 날 더 예뻐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나에게 엄마는 질투한 듯 말했다.
“같은 김 씨라고 넌 아버지만 좋아하지!”
아버진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고아가 된 고모 3명은 배고픔을 피해 일찍 결혼했다. 혼자 남은 아버지는 밥만 먹여주면 된다는 조건으로 남의집살이 했다. 배를 자주 곯았다 한다. 그래서인지 ‘배고픔은 죽음이고 슬픔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세끼 밥이다’라고 했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이나 친구들도 꼭 밥을 먹여 보냈다. 우리 6남매가 밥상에서 맛없게 먹는 날엔 큰 소리로 혼내면서 숟가락으로 손등을 때렸다. 우린 눈물, 콧물 흘리면서 밥을 꾸역꾸역 떠먹었다.
어린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중앙시장에서 점방을 했다. 2~3평쯤 되는 곳으로 온갖 물건이 있는 만물상회였다. 점방 다락방은 우리 6남매 식당이자 놀이터였다. 가끔 잠든 우리를 아버진 걸리거나 업고 살림집으로 갔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2~3평 단층 점방을 팔고, 9평 3층 가게로 확장 이사했다. 부모님은 우리 6남매 결혼 후까지도 그곳에서 장사를 계속했다.
이젠 쉬시라는 우리 성화(成火)에 환갑 지난 아버진 가게를 전·월세 놨다. 40년 가까이했던 일을 멈춘 것이다. 가게 떠나는 걸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성질 못된 내가 한마디 했다.
“아버지! 회사도 60이면 퇴직하잖아. 두 분도 이제 퇴직할 때가 된 거야. 자식들도 다 자리 잡았으니 이젠 편한 시간만 가져봐. 자 갑시다. 꽃길 걸으러.”
“예끼! 아직 이렇게 힘이 펄펄 넘치는데….”
“아이고! 아버지 환갑 넘었으니 이젠 쉬셔야지. 엄마도 마찬가지고. 앞으론 아끼지 말고 팍팍 쓰면서 맛있는 것 사 먹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셔! 알겠죠?”
가게에서 받는 월세는 부모님 생활비가 되었다. 부족한 부분은 우리가 가끔 드리는 용돈으로 해결했다. 그런 부모님께 난 또 잘난 척하면서 소리 질렀다.
“가게를 팔든지, 은행에 넣어둔 전세금을 쓰든지! 사시는 동안 그냥 다 쓰라고요!”
엄마가 벌인 사업으로 두어 차례 말아먹은 후, 경제권을 꽉 쥔 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 돈으로 우리 둘은 살만하다. 필요 없이 돈을 뭐 하러 써!”
우리 6남매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가게를 팔았다. 딱히 누가 관리할 수도 없고, 더 이상 그곳에 갈 이유가 없어서였다. 아버지의 성실함과 노력, 가족에 대한 책임감, 깊은 사랑을 우린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며칠 전 나는 소주와 과자를 챙겨 가족 봉안당을 갔다. 흙먼지가 가득한 봉안당 안을 깨끗이 닦고 문을 활짝 열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계신 두 분께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 불었다.
“아버지 바람 쐬니 어때? 답답함이 싹 사라지지. 엄마는 시원한가 봐. 두 분 가게 팔린 건 아시죠? 이제 가게는 싹 잊고 두 분이 더 재미나게 지내세요. 자! 소주 한잔하시고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 날려버리세요.”
바람이 내 마음을 대신 전달하듯이 나무를 흔들어댄다. 아버지가 술 한잔 드시면 늘 부르던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면…’ 노래도 들린다. 엄마보다 3년 먼저 돌아가신 아버진 평생을 그리던 당신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먼저 떠난 가족들을 그곳에서 다시 만나셨나 보다. 사진 속 아버지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로 나에게 말한다.
“그래. 잘했다! 너희만 좋으면 됐다”
아버지 첫사랑이었을 점방이 가게가 되었고, 지금은 우리 6남매의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