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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Dec 18. 2023

사랑니는 사랑이다.

휑한 자리가 퇴직하는 나와 같다.

치과를 들어서는데 어깨가 움찔거린다.

괜찮다고 나를 달래 보지만, 양쪽 어깨가 움츠러든다. 한 달 전부터 통증으로 고생한 왼쪽 아래 사랑니를 뽑는 날이다. 위 사랑니를 통증으로 뽑은 지 3개월 만이다.

치료 의자에 앉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내 몸 전체가 떨린다. 치료 준비를 마친 의사 선생님이 한마디 한다.

“환자분! 마취하고 뽑을 거니 겁내지 마시고. 조금 전 찍은 엑스레이 한번 보시죠. 뿌리가 좀 깊습니다. 찬찬히 뽑을게요. 이제 마취합니다”

얼굴 가린 소독포 안에서 입을 크게 벌린 내 모습이 공포영화다. 


는 사랑니 4개 중 이제 2개 남았다

내 나이 60이 되도록 사랑니를 보존한 이유는 일찍 망가진 양쪽 어금니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양쪽 어금니가 충치로 무너졌다. 우리가 음식을 씹으면 맷돌처럼 음식을 잘게 갈아주는 이가 어금니다. 평소 단것을 좋아한 난 치아 건강을 위협하는 것들만 먹었다. 특히 초콜릿을 끼고 살았다. 치아의 소중함을 무시한 멍청한 짓이었다. 나중에는 통증으로 음식 씹는 게 힘들었다. 마시는 걸로 배를 채웠다. 깨진 어금니는 잇몸 손상으로 이어졌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치통과 잇몸염증으로 치과 치료를 해야 했다. 수능 날도 아픈 치아를 부여잡고 끙끙댔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수능 점수가 예상을 벗어난 것은 순전히 치통 탓이다.

나는 치과에서 정해준 날짜에 맞춰 꼬박꼬박 치료했다. 손상된 어금니를 치료하면서 튼튼하게 자리 잡은 사랑니를 소중하게 관리했다. 흐물거리는 어금니를 지탱해 줄 든든한 기둥이 필요해서다. 나는 지금까지도 치아의 소중함과 치아 치료의 무서움에 치과 예약 시간이 다가오면 떨린다.


왼쪽 아래 사랑니 뽑힌 자리가 시커멓고 휑하다

약한 어금니를 지키느라 힘들었다고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동굴 속에서 소리친다. 어금니 보호를 위해 뿌리를 깊게 박고 최선을 다한 사랑니가 지금 내 모습 같다. 

가장이 되어 다시 현장으로 복귀한 난 허투루 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드문드문 이 건강에 해(害)가 되는 초콜릿을 먹듯 딴짓도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어금니를 지금까지 지탱한다고 애쓴 사랑니가 뽑히듯이 나도 퇴직이다. 

먼저 뽑아버린 윗니 빈자리로 위아래가 딱딱 맞지 않아 아래 사랑니도 잇몸이 붓고 염증이 왔다. 입안의 평화를 위해 짝이 맞아야 하니 치아 관리 잘하라는 신호다. 사랑니 뽑은 자리가 너무 넓어 출혈 위험이 있다며 두 바늘 꿰맸다. 그곳에 혀를 대보니 까끌까끌하다. ‘치과용 실’이 낯설다. 일주일 뒤 ‘실’을 제거하면서 치아 상태를 확인하자며, 사랑니가 빠진 동굴처럼 깊은 곳은 서서히 잇몸이 차오른다고 한다. 어금니를 끝까지 보호하다 떠난 왼쪽 위아래 사랑니가 고맙다. 물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에게도 칭찬을 보낸다.

치과를 나서면서 거울에 비친 나에게 질문을 한다

“넌 어금니와 사랑니 중 어떤 사람이니?”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영화처럼 떠오른다. 나는 어금니와 사랑니 둘 다였다. 관객들 평점은 모르겠다.

나는 지금보다 치간칫솔 치실 사용을 더 철저히 하겠다. 오른쪽 사랑니까지 빼게 되면 약해진 어금니를 제거하고 임플란트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치과에 대한 공포감으로 몸이 떨리지만, 오른쪽 사랑니도 머지않아 빼야 할 것이다. 정년이 정해져 있어 곧 퇴직할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 

먼저 퇴직한 분들이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퇴직하고 한 달만 편하더라. 의미 있는 일도 필요하고 놀 친구도 필요해”


난 퇴직을 앞두고 늘 목말랐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소설은 제삼자의 삶을 쓰는 거지만 수필은 제 삶을 쓰는 글이라고 한다. 나는 꽁꽁 감추었던 것을 하나둘 벗겨가며 글을 쓰고 있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렸다. 글을 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나도 그들의 글을 읽는다. 난 그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나도 낯선 그들에게 칭찬받고 있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시간이다. 이제 남은 건 용기 내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일이다. 특히 사람 남자 친구를 만들 용기가 필요하다. 난 아직은 쓸만한 오른쪽 사랑니이니깐.


나는 여전히 마취가 풀리지 않은 입을 크게 벌려본다.

먼저 떠난 왼쪽 사랑니에게 염치없지만, 오른쪽은 지켜달라 부탁한다. 왼쪽 시커먼 공간은 대답 없이 고요하다. 치아 건강을 지키겠다는 마음과 달리 내 발걸음은 마트를 향해 가고 있다. 치과 치료로 쌓인 스트레스를 날리기엔 초콜릿이 최고니깐. 아직도 감각 없는 입술이 삐쭉거리며 날 향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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