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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Dec 15. 2023

글씨에 쌓인 그리움

아롱이다롱이들아 잘 지내니?

10년 전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 보건실은 리모델링을 했다구석구석 정리 후 쌓였던 것들을 버렸다. 덕분에 깔끔한 환경이 되었다. 난 근무하는 동안 제때 정리 정돈을 잘하자 다짐했다. 매년 겨울방학 들어가기 전 보관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했다. 버려야 할 것들에 아쉬운 마음이 생겨 자꾸 눈길이 갔다. ‘이건 이런 기억이, 이건 이런 추억이, 이건 이때 필요할 거야… 등’ 이유가 많았다. 다시 보건실 한쪽에 쌓여갔다. 내 책상 주변이 넓어 그나마 봐줄 만했다.


 오늘은 컴퓨터 교체 일이다본체와 모니터 모두를 바꾼다난 몇 개월 후면 정년퇴직이라 이대로 사용한다고 했다. 교육부 방침이 10년 넘은 기기들은 모두 교체해야 한단다. 게으른 난 여러 가지 핑계로 미루었던 정리를 시작했다. 컴퓨터 파일을 먼저 점검했다. 10년 동안 일한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잠자는 교실을 깨우기 위해 아이들과 같이 노래하는 사진, 임신 체험복을 입은 남학생들 사진, 하임리히법 시범 사진, 교내 축제 때 아이들과 어울려 춤추는 사진 등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웃고 울었던 시간을 휴지통에 버렸다. 책상 한쪽에 모아둔 교무수첩을 꺼냈다. 누렇게 변색한 수첩들 사이에 들어있던 종이들이 툭 떨어졌다. 노트 반쪽, A4, B4 용지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담임하는 동안 학생들에게 받은 반성문이다. 눈에 익은 삐뚤빼뚤한 글씨가 나에게 손을 흔든다. 


 난 수업 시간에 미리 만들어둔 파워포인트 자료를 사용한다둥글고 넓적한 어른스럽지 않은 글씨체로 칠판에 글을 쓰기 싫어서이다. 꼭 써야 할 경우엔 칠판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썼다. 이런 내 맘도 모르고 어떤 학생은 글씨가 예쁘다고도 했다. 

요즘 교실엔 사물함이 있다. 성장기 아동에게 무거운 가방이 해(害)가 된다며 설치한 것이다. 덕분에 학생들은 학교에서 사용할 것을 두고 다닌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 학생들은 등교 시 책가방이 없거나 빈 책가방을 들고 온다. 노트 필기 세대인 나와 달리 컴퓨터와 함께 한 대부분 학생은 필기도구도 없다. 글씨체에 관심이 많은 난 학생 때 글씨 쓰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본다. 쓰다 보면 더 나은 글씨체가 되기도 하니깐. 나는 수업 중 절반으로 자른 A4용지를 나눠줬다. 활동 시간에 문제 정답을 쓰도록 했다. 귀찮아하는 학생이 대다수였다. 점수 운운하면서 쓰게 했지만, 아예 빈 종이로 제출한 학생도 있다. 몇 장 안 되는 정답지에서 나는 지렁이를 봤다. 읽고 싶었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수업 중 나눠준 연필이나 볼펜은 끝 종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청소하던 날. 32, 33번은 왜 빠졌을까?>

 수업 시간에 하는 건 한계가 있어 우리 학급을 대상으로 글씨 쓰기를 했다. 먼저 교칙 위반 학생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사안별로 A4, B4 용지를 나눠주면서 빼곡하게 채우도록 했다. 글씨 쓰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던 녀석은 교칙 위반 횟수가 줄기도 했다. 조회 시간엔 학급 전체 학생과 집·학교 주소, 부모님 성함, 자신 이름, 담임선생님 이름을 썼다. 한자(漢字)도 포함했다. ‘자신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줄 알아야 어른이지’라고 강조했다. 한 달에 한 번 칠판에 한자로 자신 이름을 정확하게 쓰면 청소를 제외해 줬다. 글씨를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쓰면 반성문 용지를 B4에서 A4로 바꿔줬다. 더는 쓸 게 없다고 ‘노래 가사, 영화 대사, 국어책 한 페이지, 사랑해’ 등을 쓴 녀석들도 있다. 아이들은 구시렁대면서도 내 입 모양이 한일자로 변하면 무섭다면서 순순히 썼다. 처음엔 힘없고 작던 글씨체가 조금씩 달라졌다. 글씨는 자신 얼굴이니 외모 가꾸듯이 정성을 다해 쓰라고 격려했다. 외국어보다 더 읽기 어려웠던 글씨들이 한글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변해가는 글씨를 칭찬해 주라는 문구를 넣어 조회 시간에 썼던 것들을 학기 말 성적표와 같이 보냈다. 학부모님들께선 초등학생 가정통신문 같다며 웃으면서 답신을 보내왔다.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누렇게 변색한 반성문이 반갑다지금보다 날렵하고 젊었던 내 모습도 생각난다. 하나둘 읽다보니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연필 잡는 방법까지 가르쳤던 녀석은 벌써 아이 아빠다. 엄지와 검지를 꽉 쥐면 아프다고 날 째려봤다. 그 생각에 내 손가락이 지금도 아프지만 웃음이 난다. 

다음 주 2학년들은 선배와의 대화시간이 있다. 반성문 속에 반성은 하지 않고 국어책 한 페이지를 쓴 녀석이 온다. 그놈은 이 반성문을 기억할까?

나는 반성문을 종이 분쇄기에 넣으며 목이 멨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나랑 같이했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반성문 속 아이들이 내겐 묵혀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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