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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Nov 06. 2023

엄마 미안해!

 친정 부모님께서는 3년 간격으로 같은 계절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늘그막에 당신만 남편이 있어 귀찮다고 자주 하소연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생각지도 않게 무척 힘들어하셨다. 늘 아버지보다 목소리도 크고 모든 일에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던 엄마의 연약한 모습이 우리 6남매는 낯설었다. 엄마는 3년 동안 “외롭다. 무섭다. 부끄럽다. 힘들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6남매 중 같은 지역에 사는 딸 셋 중 여동생 둘은 직장 생활 중에도 엄마를 자주 챙겼다. 게으르고 성질이 못된 난 툴툴거리면서 “이제는 귀찮은 남편이 없으니 훌훌 날아야지”라면서 엄마께 자주 가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는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집 밖으로 힘든 걸음을 내디뎠다. 또래 어르신들과 다시 어울리면서 차츰차츰 기운도 회복하셨다. 그런 엄마를 응원하기 위해 여동생 둘과 난 경로당에 간식을 자주 갖다 드렸다. 경로당에 계신 어르신들께서 입을 모아 “멀리 있는 자식들은 남이여! 저렇게 가까이 있어야지. 아휴 이쁘기도 하지.”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근엄한 표정과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오지 말라고 해도 저렇게 혼자 있는 엄마 보겠다고 오구만.” 하시면서 들고 간 간식거리와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어쩌면 엄마는 주변 어르신들께 ‘비록 남편은 떠났지만, 자식들이 이렇게 나를 챙기는 것 봐라. 난 당신들하고 다르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라는 자랑을 하고픈 것은 아니었을까? 난 그런 엄마 마음을 읽지 못하고, “직장 생활하는 우리도 주말엔 좀 쉬어야지. 엄마도 혼자 있는 연습 좀 해!”라며 못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곤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3번째 맞이한 기일 며칠 전, 난 곱게 차린 엄마를 모시고 아버지께 다녀왔다. 미소가 예쁜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며, 엄마는 구시렁구시렁 내 흉을 봤다. 마치 퇴근한 가장에게 그날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듯이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하셨다. 그때의 엄마 모습은 수줍어하면서도 할 말 다 하는 이제 갓 시집온 새색시 같았다. 난 “아! 부부란 저런 거지. 아이고 저런 목소리는 나도 안 해봤다.”라며 엄마를 놀렸다. 자식들 앞에선 “너희들 아버지이니 살았지. 너희들 아님, 벌써 이혼했다.”라던 엄마는 말과 다르게 아버지가 몹시 그리웠나 보다. 살짝 붉어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래, 죽은 내 서방이 보고 싶다. 이것들이 아버지 죽고 날 구박만 해. 못된 것들!”이라며 눈가가 촉촉해지셨다. 그날이 엄마가 비록 지팡이에 의지는 했지만, 당신 스스로 걸어서 아버지께 간 마지막 날이었다.     

 전국에 독감 주의보가 내렸던 그해 겨울, 아버지 3번째 기일이 지난 며칠 후 엄마는 오른쪽 무릎 골절로 반깁스를 해야 했다. 독감 유행으로 노약자는 입원이 힘들다는 병원을 원망하면서, 재가 보호 센터를 통해 집에서 요양보호사님 방문을 받았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부쩍 노쇠해진 엄마는 지팡이에 의지해 힘들지만 혼자 걷기는 하셨다. 하지만 반깁스 후 외출은 물론 화장실 가시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여동생 둘과 나는 교대로 주말엔 엄마 곁을 지키기 위해 친정집을 들락거렸다. 물론 여동생 둘은 별말 없이 다녔었지만, 성질이 못된 난 그래도 움직이셔야 한다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집 안에서 걷기 연습을 시키곤 했다. 변명하자면 움직여야 소화 및 배변 활동이 원활해져 회복에 보탬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출근한 요양보호사님이 화장실에 쓰러져계신 엄마를 119와 함께 병원으로 후송하셨다. 엄마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3년 전 아버지께서 마지막을 보냈던 그 중환자실에 엄마도 입원하신 것이다.

 중환자실은 누군가가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있는 곳이다. 보호자 대기실은 그 누군가의 가족들이 모여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모습들로 가득한 곳이다. 그들 숨소리조차도 귀를 때리는 소음인 듯한 그곳은 밖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슬픈 전쟁터였다. 

 엄마는 아버지와 같은 계절인 겨울의 병원에서 한 달 정도 계시다 돌아가셨다.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더 강해지셔야 한다고 못되게 굴었던 난 너무 죄송해서 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렇게도 힘들어하시던 엄마를 못 견딘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전등이 고장 난 캄캄한 터널’이 그려졌다. 그래서 ‘전등만 고치면 되지’라는 생각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후 사람마다 죽음에 대한 슬픔의 깊이와 색깔이 다름을 알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죽는다는 것은 무섭고 슬픈 것이며, 세상에 호상(好喪)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


 아버지께선 행여 당신이 떠나면 우리에게 짐이 될까 봐 살아생전 가족 봉안당을 만드셨다. 아버지 조상님들도 같이 계신 가족 봉안당을 갈 때마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했던 난 너무 부끄럽고 죄송했다. 특히, 6남매를 키우면서 아버지랑 같이 장사를 하신 강하고 당찬 엄마라고만 생각했던 엄마의 연약함을 몰랐던 것을 반성하며 마음속으로만 죄송하다고 웅얼거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5년. 난 이제야 마음속으로만 웅얼거렸던 죄송한 마음을 담아 반성문을 쓴다.

 “엄마! 늘 미워죽겠다던 엄마 남편을 다시 만나니 좋으세요. 좋아하는 표정이 여기서도 보여요. 아버지 떠나고 엄마께 못되게 굴었던 둘째 딸은 잊고 그곳에서 두 분이 더 알콩달콩 사세요. 죄송했습니다.” 

아마도 엄마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 거다. 

 “아이고! 평소처럼 해. 잘난 척하면서 늘 하던 대로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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