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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Feb 24. 2024

퇴임사

드디어 퇴임식을 했다.

사실, 어제저녁 깊이 잠들지 못했다. 진짜 마지막 근무일이 다가와서다. 퇴임사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뒤척거리다 보니 아침이다. 잔잔한 음악과 어울리는 비가 내리고 있다. 차라리 시원하게 퍼붓는 비였다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거실 베란다 창을 열었다. 손을 내밀었다. 날씨가 차가워 손이 금세 떨렸다. 난 손바닥에 부딪치는 비를 털며 퇴임하는 나에게 '고생했다'라고 인사했다. 이젠 진짜 자유인이다. 난 야(夜)하고 광(光) 나게 지내겠다.

흔히 '섹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야하다'를 네이버 국어사전에 찾아봤다. '천박하고 요염하다'란다. 그러든 말든 중의적인 의미로 앞으로의 나에게 '야하게'를 당부했다. 직업이 주는 테두리에서 조금 벗어나도 괜찮다는 뜻을 포함했다.


오전 11퇴임식장에 평교사 4명이 단상에 앉았다. 퇴임하는 교장선생님은 우리를 보내고 교장선생님과 퇴임식을 한다. 단상에 앉아 새순처럼 푸릇푸릇한 젊은 선생님들을 바라보니 눈앞이 뿌해졌다. 나도 몇 년 전까지 저들처럼 빛나는 눈을 가졌는데. 이젠 노안과 백내장이 시작되어 눈앞이 뿌해지고 있다. 방송담당 선생님이 만든 떠나는 우리에게 보내는 동영상을 시청했다. 학교 행사에 참여했던 우리들 모습이다. 동영상 펄펄 날고 있다. 퇴임자들과 남는 자들이 손뼉을 치며 웃다 울컥한다. 힘들어 뛰쳐나가고 싶던 순간보다 즐겁고 신났던 일들이 떠오른다. 자리에 없는 학생들과 단상 아래 앉아 떠나는 자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저들이 있어 완성된 동영상이다. 퇴임자 4명은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며 크게 박수를 치며 웃었다. 이곳에 우리가 함께 있어 즐겁고 행복했다. 부디 남은 자들도 그러하길.


순서대로 몇 마디씩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떨리는 손을 얌전히 부여잡고 최대한 담담하게 내 마음을 전했다.

"전 커피를 좋아합니다. 맛을 알아서는 아니고 커피를 마시면 위로가 되서입니다. 학교에 출근을 하면서부터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커피를 먼저 마셨습니다. 덕분에 단단해진 마음으로 출근을 했고요. 이제야 고백하지만 한동안 제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출퇴근길에 나에겐 내일은 없다는 마음으로 선 넘는 운전을 했었습니다. 그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며 제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던 가족들과 우리 선생님들 학생들이 있어 오늘 이 자리에 제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전 光姬답게 光姬롭게 지내다 갑니다. 저와 기억의 한 페이지를 함께 해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전 이제 夜하고 光난 세상으로 가보겠습니다. 선생님들도 광(光) 나고 윤(潤)이 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대충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울컥하는 마음에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긴 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부모님께서 늘 '넌 눈물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라 하셨는데. 두 분이 오늘 이 자리에 계셨다면, '고생했다. 오늘 하루쯤은 울어도 괜찮다' 하셨을 거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뒤풀이를 했다. 졸업생들이 준비해 준 것들과 동료, 가족들의 파티까지. 꽉 찬 완성품이 된 느낌이다. 27년을, 아침 알람을, 팔팔 날던 청춘의 서랍을 닫는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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