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뱃살공주 Feb 25. 2024

파보면 묘할 것이다.

영화 '파묘'를 보다.

올해 서른여섯 인 딸이 서네 살 무렵 남편과 싸우고 가출했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기억은 없다. 집에 남편이 있었으니 일요일이었을 거다. 난 남편과 딸아이만 집에 남겨두고 그때 살던 포항 시내로 갔다. 그 당시엔 커피숍이 아닌 다방이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커피 한 잔을 놓고 앉아있는 여자 모습에 다방 안을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난 그들의 따가운 눈빛이 싫어 근처 영화관으로 갔다. 영화를 3편이나 봤다. 그중 유일하게 '에이리언' 한 편만 지금까지도 생각이 난다. 전사처럼 용맹하던 시고니 위버 배우가 에이리언의 숙주가 되었는데, 그것과 같이 용광로로 뛰어든 모습이 너무 신선하고 충격적 이어서다.


그때 몇 시에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아파트 현관문을 남편이 아무 말 없이 열어줬고, 딸 아인 내게 뛰어와 안겼던 건 잊히지가 않는다.


영화를 혼자 봐도 좋다고 생각한 게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오늘 아침 조조로 '파묘'를 보러 갔다. 며칠 동안 '나의 퇴임'으로 들떠있던 집이 다시 내가 살던 집 기운으로 돌아와서 난 영화관을 갔다. 음산한 음악과 어두운 배경으로 시작된 영화에 난 주먹을 꼭 쥐고 집중했다.     

젊은 여자 무당 화림(배우 김고은)이 봉길(배우 김도현)의 북소리에 맞춰 굿을 하는데. 난 갑자기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무당은 아니었는데. 한번 터진 눈물은 샘물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옆자리 관객에게 미안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친정엄마는 살던 동네에서 '미쳤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해 10월 9일 한글날 나보다 3살 어린 초등학교 1학년 남동생이 실종되었다. 그 후 엄마는 아침저녁 동생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녔다. 그런 엄마를 철없는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그렇게 불렀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엄마는 더 미쳐갔다.

밤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사람을 찾습니다' 전단지에 남동생 사진을 붙였다. 지금은 집에서 만들어 프린터기로 출력하면 되지만, 그땐 인쇄소에 맡겨야 했다. 종이질도 좋지 않았다. 인쇄소에서 찾아온 전단지에 동생사진을 직접 붙여야 했다. 사진에 풀칠하는 우리 형제들 손은 방안을 맴도는 찬기운에 얼기도 했다. 사진을 붙이고 나면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우리 형제들은 편지를 썼다. '대통령님께'부터 '도지사님께'까지. 많기도 했다. 그렇게 전단지를 뿌리고 편지를 보내고. 아버진 전국 보육시설에 혹시 동생이 있나 찾아다녔다. 어느 경찰서든 '어린아이 시체 발견'했다는 전화를 받으면 엄마와 아버지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그곳에서 동생이 아닌 다른 집 아이 시체를 보고 오는 날엔 큰 무당을 모시고 우리 집 마당에서 '굿'을 했다. 엄마는 빌고 또 빌면서 무당이 하라는 대로 했다.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동생 모습이 보인다며 소리 지르다 뛰쳐나가기도 하고. 당신 잘못이라고 악을 쓰며 울기도 했다. 마치 신들린 여자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며 그 자리에서 돌고 또 돌기도 했다. 아버진 당신 가슴을 치며 울거나 땅을 치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형제를 잃은 우리 5남매는 마루 기둥 뒤에 서서 무섭고 슬퍼 그냥 울었다. 무당 손에 든 싸리 빗자루나 칼. 온 동네를 울리는 북소리와 음식냄새에 몰려든 동네 사람들과 떠돌이 개들까지. '굿'하는 날 우리 집은 난장판이었다.

다음 해 1월 날짜는 기억이 없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요란하게 누군가를 부르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내가 대문을 열었다. 지금도 가슴이 뛴다. 군인이던(그 당시 의무부대 대위였다.) 고종사촌 오빠가 내 동생 손을 잡고 서있었다. 하루 전 아버지가 들렸던 서울 역 근처 보육원에서 말없는 아이라고 원장이 보여주지 않던 아이가 내 동생이었단다. 민간인인 아버지는 귀찮아하며 무시하던 그들이 군인 신분인 오빠한테는 동생을 보여준 것이다. 자기 뜻과 다르게 동네 형을 따라갔다 낯선 곳에 버려진 동생은 두려움에 말을 더듬었단다. 어눌하게 더듬거린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경찰과 보육시설 관계자들에게 혼나다 보니 동생은 입을 아예 닫아버렸고.  그 시절엔 그랬다. 공권력이 힘없는 사람들에겐 하늘보다 높은 힘을 과시했었다.

동생은 약 4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에 멍자국과 피부병을 달고 왔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보육시설에 있는 아이들의 슬픔을 내 동생도 가슴에 품고 왔다. 엄마는 동생과 꼭 붙어살았다. 지난 4개월을 채워주려고 애를 쓰신 것이다. 동생은 엄마의 정성과 사랑에 건강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동생을 다시 찾은 우리 가족들은 '실종 아동 찾기' 뉴스를 들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무당 화림이 '굿'하는 장면을 본 순간 엄마가 생각나다니. 아마 내 '퇴임'이라고 딸이 준비해 온 '엄마가 내 엄마라서 넘 행복해♡'라는 문구 때문일 거다. 돌아가신 엄마의 힘이 오늘까지 내 곁에 우리 형제들 곁에 남아있다.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 우리 형제들이 두 발로 우뚝 서 있길 지지하고 계신다.  


장재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땅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당하기만 했다. 상처가 곪아 터졌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걸 파묘해버리고 싶었다. 과거의 아픈 상처와 트라우마, 두려움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영화에서 풍수사 상덕(배우 최민식), 장례지도사 영근(유해진) 무속인 화림(배우 김고은)과 봉길(배우 이도현). 이들 4명이 괴담으로 알려진 '쇠말뚝'을 지키는 아니 '쇠말뚝인 일본 장군귀신'을 뽑아 처리한다. 이 땅에 아직 남아있을 두려움을 제거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영원히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땅이다.


작가의 이전글 퇴임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