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달이 뜬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과 만나다.
오늘 아침 10시 30분쯤 이마트를 갔다. 평일 아침시간에 대형마트라니.
27년 동안 내 몸과 마음이 빠른 걸음으로 일터로 가느라 평일엔 꿈도 꾸지 못했던 곳이다.
나는 여전히 시계 초침 소리를 힐끔 거리며 일터로 달리는 사람들 뒤통수를 바라보며 기지개 쭉 켜는 단맛 나는 순간을 즐기고 있다. 바쁘게 총총히 아닌 느긋하게 천천히 하는 시간이 아직은 흥미롭고 좋다.
특별하게 구입할 건 없는데 오래간만에 대형마트 맛을 보고 싶어 나선 길이었다. 평일 아침 시간이라 마트 주차장은 한산했다. 주말에나 가끔 오던 이곳 주차장이 이렇게 넓다니 난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나는 마트 정문과 가까운 곳에 여유롭게 천천히 주차했다. 오가는 자동차도 드물어 마트 앞 횡단보도는 한산했다. 통행량이 많은 주말엔 좌우 살피느라 가자미눈이 되던 내 두 눈은 앞 쪽만 바라보며 느긋한 걸음으로 마트 정문을 향했다.
마트 안에 들어서니 스타벅스가 입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사람 마음을 홀리는 커피 냄새에 피리 부는 사나이 뒤를 따르듯 난 스타벅스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한쪽에 세워진 카트 앞을 지나가는데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보였다. '지금은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아이들이 마트에 웬일이지.'라며 난 아이들 쪽을 바라보며 커피 주문을 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커피 주문 후 기다리는 서너 명은 스마트폰에 눈을 박고 있다. 난 웅성거리며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궁금해 아이들 쪽을 바라봤다. 그때 계산을 마친 남자분이 아이들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우르르 그분 쪽으로 몰려갔다. 그분 손에 들려있는 비닐봉지를 피해 아이들은 인사했다. 손짓 발짓하며 이야기하는 아이들에게 머리와 비닐 든 손까지 좌우로 흔들며 남자분은 가던 길을 갔다. 떠나가는 남자분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숨 내쉬는 아이들이 짠했다. 아이들 한숨 속에 섞인 애달픈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다.
난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 학교는 안 가고 여기서 무엇을 하는 중이니?"
왼손에 연필이 끼워진 수첩을 든 여학생이 날 바라보며 인사부터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ㅂ초등학교 4학년 3반 이**입니다. 저흰 사회 수업시간에 이 지역 대형마트를 조사 중인데요 혹시 저희에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코끝에 매달려 있는 안경을 오른손으로 올리며 여학생은 나에게 또박또박 물었다. 여학생 목소리가 신호음이었는지 아이들 7~8명이 나를 에워싸 난 살짝 당황했지만 속내를 숨기고 아이들을 둘러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몰려있던 학생 중 멜빵바지를 입은 남학생이 핸드폰을 켜며 나에게 물었다.
"혹시 아주머니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제가 촬영해도 될까요?"
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쁘게 찍어 준다면 허락할게."
남학생은 걱정 말라며 능숙하게 촬영을 시작했고, 여학생은 또렷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지금부터 5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지금 이곳에서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둘째, 이곳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셋째, 이곳을 이용하면서 불편했던 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넷째, 이곳을 자주 이용하십니까? 다섯째, 저희와 인터뷰 후 저희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흥분한 목소리지만 또박또박 힘을 주며 물었다. 난 촬영하는 남학생 쪽으로 얼굴을 돌려 진지하게 대답했다.
"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물건을 사러 온 손님입니다. 이곳의 장점은 여러 가지 물건이 찾기 쉽게 곳곳에 있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용하면서 불편했던 점은 1인 가구에겐 소량이 필요한데 대부분 묶음으로 양이 많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 이곳을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용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살 때도 있고 그냥 구경만 하다 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지금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궁금하면 찾아보고 물어서 많은 것을 배워나가는 사람. 여러분에게 어렵고 힘든 순간이 와도 든든한 어른들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 여러분들도 좋은 어른이 되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와~~~ 아"
어느새 내 주위로 20 명 가까이 모인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박수를 쳤다.
계산대에 서 있던 분들이 놀란 얼굴로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멋쩍어 미소만 지었다. 손뼉 치며 소리 지르던 아이들이 갑자기 정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며 누군가를 불렀다.
"선새앵~님"
정문 쪽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 여자분이 아이들 쪽으로 바쁜 걸음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여자분은 당신이 4학년 3반 담임이라며 아이들과 함께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아이들의 대형마트 체험학습으로 신경이 곤두섰을 선생님 마음을 알기에 난 선생님께 괜찮다고 답했다.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을 중심으로 서로 자기 말을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선생님은 2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매장을 향해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인사한 후 마트를 나갔다.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난 이미 식어버린 커피잔을 꽉 쥐고 쇼핑은 잊은 채 그들 뒤를 따라나섰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더웠다. 6월 말 태양이 8월 태양만큼 뜨거웠다. 햇빛에 눈이 부신 난 잔뜩 찡그린 채 커피를 마셨다. 식어버린 커피지만 마트 안에서 만난 아이들 덕분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마치 기자처럼 차근차근 질문하던 여학생과 정확한 촬영을 위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찍어대던 남학생. 그 학생들을 둘러싸고 눈을 반짝거리던 4학년 3반 아이들. 이번 체험학습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 이 아이들이 바라본 어른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장차 이 아이들은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될까?
이 아이들은 알까? 나도 자기네들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모든 게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오늘 인터뷰에 응했던 아줌마도 오래전엔 너희들처럼 통통 튀며 살았다는 걸.
촬영본을 보진 못했지만, 화면 속 난 아이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입으로 뱉지 못한 말을 눈으로 말했을 것 같다. 어제의 너희들이 오늘의 나라고. 덕분에 내가 이곳에 이렇게 있다고.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고.
난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볕 속으로 걸어가며 아이들에게 인지 나에게 인지 당부하는 말을 했다.
'낮 동안 환함을 선사하는 해도 시간이 되면 산 너머로 지고, 해가 떠난 자리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환한 달이 차오른단다. 너희들이 나의 과거이고, 내가 너희들의 미래이니 우리 앞으로도 건강하고 밝게 잘 살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