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써니'처럼
죽는 순간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추억’이다.
2011년 5월 영화 ‘써니’가 우리 가슴을 휘저었다.
가정의 달이라고 다들 들떠있는 5월.
햇빛 속에 앉아있으면 눈이 사르르 감기는 계절.
이젠 가슴에만 남아있는 젊음과 그리운 추억들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집안 살림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원인은 무리한 사업확장과 보증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쯤엔 우리 가정을 책임지던 가게까지 전세 놨다.
우리 집은 사용 중이던 전화기만 남았다.
6남매 중 오빠, 언니는 결혼했고, 나머진 학생들이라 학비가 생활비 절반 이상을 차지할 때였다.
넋 나간 부모님 대신 누군가 가장이 되어야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내가 적격이었다.
전국에서 월급이 제일 많다는 교수님 말씀에 난 낯선 곳으로 떠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빠진 연애소설 속 주인공 같은 마음으로 갔다.
세상이 소설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순수한 대학생이었다.
‘간호사 국가고시’를 한 달 앞둔 학생이라 ‘수습생’이라는 명목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학생 티를 벗지 못한 난 귀찮아하는 선배에게 물어가며 일을 하나, 둘 배웠다.
지금은 덜하지만 1984년 당시 간호사 세계는 마치 군대처럼 서열이 확실했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일명 ‘태움’이 ‘일상’이던 때였다.
수습생이었지만 정식 간호사처럼 근무하기를 바라는 선배도 있었다.
나는 선배들 눈치 속에 잔뜩 긴장한 채 근무했다.
병원은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수습이라 낮 근무만 하던 입사 동기들은 퇴근 후 휴게실에 모여 설움을 토했다.
선배들이 나타나면 마치 바퀴벌레가 구석으로 도망치듯 휴게실서 싹 빠져나왔다.
우린 차분하고 다정한 좋은 선배가 되자 했다.
가족, 친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기도 했다.
나는 동기 중 마음 통한 4명과 친해졌다.
그들은 정형외과, 소아·청소년과 병동, 응급실, 내과 병동 등에 근무했다.
한 달 후 ‘간호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우린 ‘정식 간호사’로 발령받았다.
월급 명세서에 찍힌 금액이 달라졌다.
가장인 난 기숙사비와 식대만 남기고 집으로 송금했다.
친구들은 정직원이 된 후 계열사인 호텔 편의시설, 식당, 백화점을 당당하게 이용했다.
돈이 없던 난 외출하는 것이 두려웠다.
무심한 척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숙사에 박혀 생활했다.
휴게실 텔레비전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연애소설 속 주인공을 상상했다.
행복한 결말은 혹독한 아픔 후 오는 거니깐. 지금 힘든 게 맞는다고.
내 월급날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만 생각했다. 난 외로움에 파묻혔다.
친구들은 이런 나의 아픔을 몰랐다 한다.
우린 피곤해도 만나면 쫑알쫑알 대며 신나게 놀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난 부모님, 동생 3명을 짊어진 가장으로서 무게를 견딜 수가 있었다.
신입 딱지를 뗀 2년 차가 되었다.
선배가 되어 후배를 가르쳤다. 밤 근무 숫자도 줄었다.
낮 근무가 늘자 우린 근처 산업단지 남자들과 미팅하는 여유도 부렸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난 인기 없는 파트너였다.
연애소설처럼 살 거라는 내 꿈은 그냥 꿈이었다.
화려해야 할 젊음이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와 같았다.
연차가 쌓이면서 동기들이 하나둘 이직과 결혼으로 그곳을 떠났다. 우리 5명도 변화가 있었다.
어깨 위에 짊어진 무게를 던져버리고 싶던 내가 먼저 그곳을 떠났다.
우리는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맺은 인연을 쉽게 놓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연락이 쉽던 시절이 아녀서 기숙사 전화나 편지는 한계가 있었다.
각자 이직한 곳에서 바쁘게 생활하며 하나둘 우린 서로를 잊었다.
힘들어 서로 부둥켜안고 울던 기억이나 여행지에서 깔깔대며 뛰놀던 모습을 추억 속에 묻었다.
그해 영화 ‘써니’를 본 정형외과 병동 친구가 우리 4명을 찾았다.
다들 잊고 있던 첫 직장 일들을 기억했다.
20대였던 다섯 명이 50대에 다시 만났다. 참새처럼 모여서 재잘대던 친구들은 그대로였다.
우린 밤을 새워가며 문자를 나눴다.
특히 가난했던 난, 무심한 척 챙겨줘서 고마웠다고 했다. 친구들은 말했다.
“우리 모두 고만고만했어. 가시내야!”
우린 첫 직장이란 추억 속 소중한 사진을 꺼내 중년 만남을 이어갔다.
울산, 서울, 안양, 순천시 등에 살고 있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났다.
가족들은 연인과 만남을 앞둔 듯 달떠있는 우리를 열렬히 응원했다.
사춘기보다 무섭다는 갱년기에 접어든 아줌마들의 열기에 놀라서였을 것이다.
50대였던 우린 ‘자신의 늙음을 볼 수 없도록 신이 준 마지막 배려인 노안’이 온 60대가 되었다.
대학생이었던 자녀들은 결혼, 취업했다. 현직에 있던 친구들도 퇴직했다.
먼저, 우리를 찾아낸 정형외과 병동 친구는 남편 퇴직과 함께 경북 경주로 귀향했다.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 경주 박물관대학을 다니고 있다. 공부하는 60대다.
대기업 다니는 남편과 해외 지사를 돌며 외국어에 능통한, 나와 함께 소아·청소년과 병동에 근무했던 친구는 전북 장수로 귀촌했다. ‘장수가야촌살이’ 일원으로 환경 살리기 운동을 한다. 친구 부부는 살기 좋은 장수군을 알리는 중이다.
귀염성이 여전한 응급실 친구는 연로한 시아버님을 위해 마취과 의사인 남편과 맞춤형 식단 공부 중이다. 100세 시대에 맞춘 식단이다. 사람들이 선호할 것 같다.
마지막까지 그 병원에서 근무한 내과 병동 친구는 2021년 12월 정년퇴직 후 시 낭송과 도서관 봉사활동 중이다. 손녀 사랑에 푹 빠져있는 예쁜 할머니다.
친정 식구들을 위해 몇 년 가장 노릇을 했던 난 여전히 보상받는 중이다.
넘치는 관심과 사랑 속에 허우적대고 있다.
넘쳐서 힘들다는 내게 그냥 팔다리를 흔들라는 가족들. 배부르다. 그때 외로움이 추억 속에 묻혔다.
환갑을 넘긴 우리 5명은 여전히 쫑알쫑알 대며 소녀처럼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다.
건강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래도 또박또박 걷는다.
20대에 했던 약속처럼 차분하고 다정한 선배도 했다.
동굴보다 더 깊은 속내를 나누며 기쁨과 아픔도 함께하고 있다.
내년 2월 나까지 퇴직하면 5명 모두 20대부터 했던 직장 생활이 끝난다.
‘제2의 삶’이라 불리는 ‘퇴직 후 삶’은 더 여유로울 것이다.
앞으로 우린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살 일만 남았다.
나는 생각만으로도 들떠 양쪽 볼이 실룩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