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가다듬다. 1
어젠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 아침 하늘은 햇빛이 가득하다. 난 베란다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실컷 쏟아져 내린 비가 미세먼지를 끌고 갔는지 하늘이 거울처럼 투명하다. 하늘에 비친 부스스한 얼굴을 난 두 손으로 매만졌다. 한참 동안 고개를 쳐들고 있었더니 힘들었다. 고개를 숙이려는데 날아간 줄 알았던 미세먼지가 거실 창틀에 뿌옇게 자리 잡고 있다.
어제저녁 내 손가락 끝에서 만났다가 창밖으로 버려진 자음과 모음도 창문에 붙어 지저분했다. 난 지저분한 창문과 창틀을 닦으며 집 안 청소를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청소했다.
난 깔끔해진 집을 바라보며 식탁에 앉았다. 청소하는 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글을 정리하려 컴퓨터를 켰다. 문장 하나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몇 자 안 되는 글자들이 제각각 날아다닌다. 난 팔을 뻗어 달아나는 글자를 잡아 자리에 앉혔다. 뒤죽박죽 엉클어진 글자들이 날 보고 비웃는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팔다리를 휘휘 저으며 비웃는 글자들을 또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글자들이 27층 베란다 난간에 걸렸다. 난 안타까운 마음에 엄지와 검지로 그들을 데려왔다. 다시 써 내려갔다. 맞춰진 문장을 소리 내 읽어봤다. 내 입술과 목구멍이 먼저 아는 체했다. ‘이건 읽기도 힘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는 쓰인 글자를 지우고 새로운 글자들로 문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하얗게 변해버린 내 머릿속은 엉뚱한 글자들만 내놓는다. 내가 만든 문장들이 서로 칼을 겨눈다. 난 그들을 글자 세계로 날아가게 길을 터줬다.
나는 한숨과 함께 컴퓨터를 하염없이 째려봤다. 점점 가자미눈이 돼가는 내 눈이 꼴 보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동실 문을 열어 꽁꽁 얼어있는 ‘커피 사냥’ 하나를 꺼냈다. 이럴 땐 커피 맛이 나는 얼음과자가 가뭄 때 내리는 단비가 되기도 하니깐. 얼음을 씹어 먹으며 난 한 글자씩 다시 써 내려갔다. 쓰다 보니 어느새 한 페이지다. 완성된 글을 찬찬히 읽어봤다. 목구멍에 또 걸린다. 지퍼 이가 맞지 않아 벌어진 바지를 입은 듯 부끄러운 문장들이다. 위아래가 어색하게 겉도는 옷차림 같은 글을 읽다 난 컴퓨터를 꺼버렸다.
라디오에서 들리던 음악방송 소리도 멈췄다. 틈틈이 귀를 행복하게 해 주던 충전식 라디오가 멈춘 집안은 너무 고요했다. 난 안방으로 뛰어가 보조배터리를 가져왔다. 충전을 시작한 라디오를 켰다. 충전기를 꽂았는데도 전원 버튼이 켜지지 않는다. 목구멍에 걸린 글이 캑캑거리게 하더니, 라디오도 날 속상하게 한다. 난 조용한 라디오를 툭 치며 텔레비전을 켰다. 고속도로 교통사고 소식이 흘러나온다. 가족 병문안 가던 모녀 경차와 음주 운전자 역주행 차량 충돌사고다. 경차 조수석에 있던 운전자 엄마는 사망이란다. 난 슬픈 소식이 듣기 싫어 채널을 돌렸다. 곧 매진이 예상된다고 외치는 건강식품 판매 홈쇼핑에 꽂혔다. ‘퇴직 후 눈도 침침해지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도 아프던데’라는 생각에 스마트폰을 들었다. 홈쇼핑 전화번호를 누르려는데 멈췄던 라디오에서 소리가 들렸다. 홈쇼핑 호스트 목소리에 빨려 들어가던 난 얼른 텔레비전을 껐다. 지금은 글공부에 매진해야지 쇼핑은 아니라고 라디오가 내게 말을 걸어온 거다. 덕분에 지갑에 돈이 굳었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난 다시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 앞에 앉아 평범한 날을 보내던 내가 어떤 마음이 들어 글쓰기를 시작했는지 더듬어봤다. 초등학교 때 매일 일기장 검사를 받으면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때 기분을 잊지 못해서인지. 습관처럼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여기저기 메모하면서부터인지.
작년 '슈퍼 블루문'을 보겠다고 전 세계가 떠들썩할 때 직장암 2기라고 떨림으로 알려온 친구. 난 감당하기 힘든 내 마음을 글쓰기에 담갔다. 서서히 숨통을 조이는 두려움과 희미하게 보이는 희망을 더 늦기 전에 쓰고 싶었다. 또박또박 써 내려가면 술술 풀릴 줄 알았던 글은 내 마음과 달리 그 자리를 맴돌았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덜덜 흔들리기 시작했다. 탁상용 선풍기가 제 날개보다 더 강한 바람을 내보내느라 기기 전체를 벌벌 떠는 것 같았다. 나는 흔들리는 머리를 꽉 잡고 틈틈이 읽었던 책을 무작위로 쌓아둔 책장 앞으로 갔다. 왼손엔 눈물을 오른손엔 땀을 잡고 살았던 내 시간이 책장에 꽂힌 책들 사이를 서성거렸다. 난 그것들을 잡아 나만의 글을 쓰려했다.
한 줄 한 줄 문장을 만들며 중학교 가정 시간에 배운 손뜨개질이 생각났다. 난 뜨개질을 시작하면 빨리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밤늦은 시간까지 놓지 않고 했다. 깜박 졸아 코를 빼먹은 적도 있다. 코를 빼먹어 구멍이 생기면 메꿀 방법이 마땅치 않아 풀고 다시 짰다. 아깝지만 빈틈없는 완성품을 얻기 위해선 풀어야 했다. 손가락, 어깨가 아프기도 했지만, 다 짠 것을 보면 흐뭇했다.
글을 쓰면서 그 감정들이 다시 내게로 왔다. 내 머릿속을 떠돌던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썼다. 완성된 문장을 읽고 어수선하면 마치 코가 빠진 뜨개질을 아까워하며 풀 듯이 글을 지웠다. 한 개의 코도 빠지지 않고 꼼꼼하게 뜨기만 하면 뜨개질은 완성된다. 거기와 비교하면 글쓰기는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노력해도 쉽게 완성품이 나오지 않는다. 한창 뜨개질에 빠졌을 때의 난 손가락이 아파도 뜨기를 계속했는데 글쓰기는 자꾸 주춤거려진다. 늦은 밤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 보지만 한 줄도 못 쓰고 잠이 들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잠이 들면 밤새 꿈을 꾼다. 난 손가락 끝에 피가 나는데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컴퓨터 화면에 비친 글자들은 서로 짓 뜯고 싸우고 있다. 자음과 모음이 앞자리를 두고 밤새 싸운다. 잠에서 깬 난 멍한 눈으로 안방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엔 글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용 한글 익히기 프린트물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난 아직 꿈속이라고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다.
내가 식탁에 앉아 컴퓨터를 켜면 냉동실에 가득 차 있는 ‘커피 사냥’이 손짓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들이 나를 위해 온몸을 흔들어대며 응원한다. 난 오늘 단맛나는 사랑을 먹으며 내 수첩 한 귀퉁이에 언제 썼는지 기억도 없는 글을 읽어본다. ‘나에게 글쓰기는 아픔보다 기쁨을 더 많이 주는 짓이다.’ 난 더 많은 짓을 하려 글 사냥에 나설 도구를 챙겼다. 냉동실 문을 열어 내 곁에서 등 떠밀어주는 ‘커피 사냥’도 헤아려본다.
*문틈에 낀 손가락 아픔을 털어내고 드디어 컴퓨터를 켰다.^^
**추석 전 수술실에 누워있던 제부는 감사하게 무사히 일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