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지나고 한번 온나"
더위가 한풀 꺾인 날이었다. 활짝 열어둔 거실 창으로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게 꿈결처럼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
김수현 작가님의 『속 깊은 무관심』을 읽다 깜박 졸았던 날이었다. 잠이 올만할 내용이 아닌데.
장모님 권유로 읽었는데 내 생각이 났다는 천재작가 '류귀복'님의 추천으로 접하게 된 책이었다.
책을 읽다 내가 작가 마음이 되어서였을까? 찡해오는 마음을 누르다 힘이 들어서였을까? 난 졸았다.
아버지 사망 후 떠난 엄마 자리를 대신 채워준 할머니. 6살 소녀가 느꼈을 혼란.
너에 대한 관심이라 생각했던 질문들. 넌 난처한 표정으로 대신한 대답들 속에 작가는 생각이 깊어진다.
흔히 '조손가정'이라 하면 '어떤 부재와 부족'을 떠 올린다. 하지만 '그것들이 삶을 통째로 남루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사방의 모든 문이 닫힌 것처럼 막막한 순간에도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음'을 알게 된다. 부모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만 있는 게 아니라는. 세상엔 보다 더 넓고 유연한 가족이 있다는 걸. 그런 가족들 품에서 풍성한 햇빛과 거름으로 가을 녘 온 들판에 퍼진 알이 꽉 찬 황금 벼처럼 자란 작가는 엄마가 된 후 '엄마'라는 단어를 다시 되새겨보기도 한다. 힘들 때 그냥 부르기만 해도 힘이 되는 '엄마'. 작가의 어린 엄마를 억눌렀을 책임감, 모성애, 희생정신 등 '엄마'라는 무거운 단어.
작가는 '엄마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라고도 묻는다. 아이를 직접 낳았든 아니든 , 할머니든 고모, 이모 일지라도 배 아파 낳은 고통 없이도 아이의 '친'한 엄마가 될 수 있으니 사랑을 쏟자고 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작가의 한 살 어린 여동생은 어른들 결정으로 입양되었다. 작가는 동생이 그 가정에서 귀한 딸이었기를 바라며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한 부모 가장인 내게 그동안 쏟아졌던 무수한 질문들. 딸아이에게 꼬리표가 되었을 질문들.
한 가닥 줄기 같은 호흡을 붙잡고 있는 내게 '열심히 살아. 다른 사람이라고 별게 없어. 오히려 둘보다 혼자가 더 좋을 수도 있어. 사람은 누구나 죽어. 좀 일찍 죽었을 뿐이야. 너라서 충분히 해낸 거야…'
내게 필요했던 건 '내 생각이 다 맞는 게 아니라는. 너와 나는 다름이 있다는 걸. 그냥 가만히 손만 잡아줘도 된다는, 바라만 봐도 된다는, 안아주기만 해도 충분하다는'거였다.
그때의 난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중얼거림으로 대신했다.
'소리 없는 총이 있다면 당신의 뒤통수를 쏴 버리고 싶어'라고.
학기 초 딸아이를 위해 제출 서류에 슬쩍 사망한 아빠 이름을 써주고 담임선생님께 따로 속 사정을 설명했다. 전화기 속에서 흔들리던 내 목소리와 눈빛. 당황하고 무시하던 선생님들.
이런 나에게 작가는 슬쩍 무심하게 흘러가는 관심, 속 깊은 무관심이 필요했다고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작년 '슈퍼 블루문'소식으로 전 세계가 들썩이던 날. 전화로 들었던 친구의 '직장암 2기'라는 목소린 오래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흔들림이었다. 5월에 포항을 떠들썩하게 들었다 놨다 하며 놀았는데. 추석날 다시 만나기로 했었는데. 친구는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시작한다는 연락을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포항에서 같이 어울려 놀던 다른 친구와 셋이 떠들던 메시지 방에서조차 묵묵부답이었다.
아마도 친구는 여기저기에서 쏟아진 관심 아니 안쓰러운, 깊은 애정 어린 질문들에 대답할 기운이 없었을 거다. 남편 사망 후 슬픈 눈빛이 담긴 질문들에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던 나처럼.
간간이 친구 딸과의 문자를 통해 서울과 포항을 오가면서 치료받고 있다는 정도만 들었다.
친구가 소식 줄 날을 기다리며 난 마음으로 응원하고 빌었다.
'그 깊은 아픔을 나에게도 좀 나눠주고. 참기 힘든 고통은 소리소리 지르고. 우리 같이 울고 웃자.'
그렇게 1년 반이 지났다.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아 통화가 힘들다던 친구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한 거다. '그래. 갈게.'라고 끝낸 전화기를 한참 동안 들고 있었다.
전화기 속에는 암 소식을 전하던 그 흔들림이 아닌 만남에 대한 설렘이 가득 찬 흔들림이 함께 했다. 기다림의 어지럼증에 나도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모습일까? 눈물을 어떻게 참을까?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심과 실제로 더 무섭고 깊었을 고통. 온몸으로 겪으며 견뎌온 친구를 칭찬해 주고 싶은데. 포항으로 가는 길이 처음으로 힘들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갓 캐낸 호두 같은 친구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난 친구를 와락 껴안았다. 내 품에 안긴 친구를 좀 더 세게 껴안고 싶었지만 부서질 것 같아 참았다. 난 뜨거워진 눈과 매운 코 탓에 깍지 낀 손을 풀지 못했다. 아기 손가락이 된 친구가 내 등을 쓸었다. 우린 서로를 자세히 뜯어보기 위해 포옹을 풀었다. 친구는 소년 농구선수 같았다. 난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는 친구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녀린 모습이 된 친구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28번의 항암과 15번의 방사선치료를 마친 친구는 8부 능선을 넘었다고 한다. 장폐색으로 시행했던 인공항루가 임시로 끝나길 소망한다는 친구 손을 가만히 잡았다. 긴 뼈 같은 손가락과 앙상한 손등을 쓰다듬어줬다. 내 손의 따뜻하고 건강한 기운이 친구 손으로 전해지길 바라면서.
포항 친구 둘과 나. 이렇게 셋은 어린이집 버스 앞에서 만나 떠들던 30대 아낙네가 되어 1박 2일 동안 실컷 웃었다. 웃다 눈물도 흘렸다. 서로 살아있음에 행복해 어금니가 보이도록 활짝 핀 웃음과 감사한 눈물.
내게 '포항'이란 단어는 수평선을 만지고 싶은 아련함이다. 내 손가락을 쭉 뻗어 만지고 싶은 푸르게 넘실대는 동해가 바로 그들이다.
어쩜 브런치스토리 시작이었을 친구에게 회복된 내 손가락 기운을 힘차게 던져주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