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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전통 기업의 첨단 산업으로의 고도화

목재기업에서 항공기업으로의 전환 : 보잉. 지역기업에의 시사점

by 지역이음이

1.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 or 특이)자원이 무엇인지 파악

2. 이를 활용한 업종전환 가능영역이 무엇인지 탐구 (첨단, 글로벌, 지역문제해결)

3. 기업가가 이를 활용하여 개척


얼마 전 추수감사절 연휴를 맞이하여 시애틀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시애틀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로 어느 정도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도시이지만, 실제 관광자원은 별로 없다. 스타벅스 1호점,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정도, 스페이스 니들(전망대), 차훌리 가든(유리공예 전시관)이 유명한 관광지라고 할 만하다. 특징이라 할만한 것은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 만큼, 스타벅스의 본사가 존재하고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1907년에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만큼 미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운영되고 있는 공공 재래시장 중 하나이다. 시애틀은 이 외의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코스트코 본사가 위치해 있고,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보잉사가 시작한 장소이다. 아이와 함께 갈만한 장소를 탐색하던 중 보잉사의 항공박물관을 들르게 되었고, 관람하며 보잉 사는 왜 시애틀에서 시작하였는가에 대하여 궁금해하다가 자료를 조사 후 글을 쓰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03년 12월 17일,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라이트형제가 First Flyer라는 최초의 동력항공기를 선보였다. 창업자는 윌리엄 보잉(William Boeing)으로 당시 워싱턴주에서 목재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기업가였다. 그는 1915년 워싱턴주에서 열린 비행 행사에서 비행기를 탑승했었고, 이후 항공기의 설계와 운항 원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비행기 제조와 관련된 기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항공기의 가능성에 매료되어 1916년 창업을 하였다. 그는 목재산업을 통해 축적한 재정적 자원과 목재 가공 기술을 항공기 제작에 활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항공기 초기 제작에는 고품질 목재가 필요했기에, 기존 사업 경험이 항공 산업 진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후 보잉은 항공기 제작과 사업 확장에 집중하며 목재 사업을 점차 축소하였고, 항공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인지하고 전적으로 항공기 제작에 주력하게 되었다. 추가적으로, 항공기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직접 투자하였다. 이 당시 그는 "더 나은 항공기를 제작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이는 현대에서 일어났던 일론머스크의 스페이스 X 투자를 연상케 한다.

초기 보잉의 이슈는 시장개척과 인재였다고 판단한다. 시장의 경우 이제 초기시장이었던 만큼 군수 산업을 개척하였다. 해군 엔지니어였던 웨스트벨트와 협력하였고, 그는 보잉과 초기 항공기 설계 방향을 정립했으며, 이후 개인 사정으로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후 웡 쯔(Wong Tsoo)가 합류하여 기술적 설계와 제작을 주도하며 보잉의 첫 항공기인 B&W 수상기(모델 C)의 완성을 이끌었다. 웡 쯔는 딱 1년간 보잉사에 근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항공 박물관에서 강조가 된 것을 보면 그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웡 쯔는 중국 베이징 출생으로 당시 MIT 항공공학을 졸업하였다. 당시 MIT는 항공공학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당시 보잉은 대학 네트워크를 통해 인재를 찾았다고 한다. 웡 쯔는 이 네트워크를 통해 보잉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웡쯔는 학문적으로 습득한 항공 기술을 실전에 적용하고 싶어 했으며, 보잉 사는 이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시 윌리엄 보잉은 자금 조달, 자원 관리, 마케팅 등 경영적인 역할을 맡아 기술 개발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즉 CEO와 CTO의 역할 구분을 명확히 하여 초기 제품을 완성하였다. 이 항공기는 미 해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모델 C를 채택하면서 보잉은 첫 번째 재정적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https://earlychinesemit.mit.edu/wong-tsoo/, 더 자세한 얘기는 여기서 참고 가능)

다시 돌아가서, 왜 윌리엄 보잉은 시애틀에서 보잉사의 창업을 결정하였는가에 대하여 얘기하고자 한다. 시애틀은 그 당시 아래와 같은 장점이 있었다.

풍부한 목재 자원: 워싱턴주는 광활한 삼림 지대로, 항공기 제작에 필수적인 고품질 목재를 대량으로 공급

태평양 연안의 전략적 위치: 시애틀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아시아와의 해상 및 항공 교역에 유리했고, 물류 허브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유

풍부한 수력 에너지: 워싱턴주는 콜럼비아 강과 스노퀄미 강 등으로부터 안정적이고 저렴한 수력 에너지를 제공해, 항공기 제조 공정을 경제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

산업 인프라와 인재: 워싱턴주는 숙련된 노동력과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같은 기술 교육 기관이 있어, 항공 제조에 필요한 기술 기반과 인재 풀을 제공


본인이 생각하는 지역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Scale-deep 이후 적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Scale-up을 하는 것이다. 전문가에 따라 Scale-deep에 대한 설명을 달리하는데, 중요한 점은 지역이 보유한 '고유 또는 특이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향후 경영에 있어서 강력한 해자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로컬', '지역'에 대한 얘기가 서서히 나오고 있지만 각 지역이 보유하고 있는 고유 또는 특이 자원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이를 활용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BM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후 보잉 사는 2001년 본사를 이동하게 된다. 주된 이동 이유로는 글로벌 접근성 강화 (시카고는 중부 위치로 고객과 파트너와 가까움), 경영과 제조의 분리 전략, 시카고의 교통 허브 및 비즈니스 친화적 환경이 작용하였다고 한다. 2022년 다시 본사를 버지니아주 알링턴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이에는 또 어떠한 이유가 있을까?


1. 정치 및 정부 접근성 강화

버지니아주 알링턴은 워싱턴 D.C. 인근에 위치해 있어, 미국 연방정부 및 국방부와 더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보잉은 군용 항공기와 방위산업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방부와의 협력은 비즈니스의 핵심이기 때문에 정부와의 접근성이 중요하다.

2. 국방 및 우주 산업에 대한 집중

보잉은 상업 항공기뿐 아니라 국방 및 우주 항공 부문에서도 큰 사업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워싱턴 D.C. 근처로 본사를 옮기면서 국방 관련 계약과 정책 변화에 더 민첩하게 대응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3. 재무 및 운영 효율성

시카고는 보잉이 글로벌 기업으로서 브랜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운영 효율성을 위해 더 적합한 위치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알링턴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기술 및 방위 관련 인프라가 마련되어 있다.

4. 팬데믹 이후 변화된 사업 환경

COVID-19 팬데믹 이후 보잉은 항공기 수요 감소, 공급망 문제, 및 재정적 압박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전략적 계획이 필요했고, 이를 계기로 본사 이전이 추진되었다.

5. 인재 및 기술 접근성

알링턴 지역은 기술 및 방위산업 전문 인재들이 풍부하며, 버지니아 공대(버지니아 테크)와 같은 인근 대학교 및 연구 기관과의 협력 가능성도 크다.

항공박물관에서도 느낀 바는 보잉 사는 이제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다시 한번 도약을 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본사의 위치를 변경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아직 시애틀 근처 에버렛에서 여전히 대규모 공장을 운영 중이라는 것이다.

보잉은 초기 역사 속에서 정부 규제, 군사 수요 변화, 기술 경쟁 등 다양한 위기를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술 개발과 시장 다각화 전략을 지속적으로 실행했다. 변화를 통한 극복의 유전자가 있다.


1. 1930년대 : 우편 항공 서비스 독점 해체

위기 상황 : 1934년, 미국 정부는 보잉과 같은 대형 항공사들이 우편 항공 서비스와 항공기 제조를 동시에 운영하며 독점을 형성한다고 판단했다. 항공우편법(Air Mail Act of 1934)이 통과되면서 보잉은 우편 운송 사업과 제조업 부문을 분리해야 했다. 이에 따라 보잉은 운송 사업 부문을 유나이티드 항공(United Airlines)으로 분리하고, 보잉 에어플레인 컴퍼니는 제조업에만 집중해야 했다.

극복 방안 : 보잉은 제조업에 집중하며 항공기 설계 및 생산기술을 강화했다. 특히, 상업 항공기와 군용 항공기 제작에 주력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2. 1940년대 : 제2차 세계대전 후 군용기 수요 감소

위기 상황 :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보잉은 B-17 플라잉 포트리스(B-17 Flying Fortress)와 B-29 슈퍼포트리스(B-29 Superfortress) 등 주요 군용기를 생산하며 급성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군용기 수요가 급감하며 회사의 주요 수익원이 사라졌다.

극복 방안 : 보잉은 민간 항공기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보잉 377 스트라토크루저(Boeing 377 Stratocruiser): 전후 최초의 민간 상업 항공기로 개발되었으며, 전쟁 기술을 상업 시장에 접목한 사례였다. 상업 항공기 개발에 투자하며, 민간 항공 시장을 개척했다.


3. 1950년대 : 제트 시대의 도전

위기 상황 : 경쟁사인 영국의 드 하빌랜드(De Havilland)가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코멧(Comet)을 개발하며, 보잉은 기술적 도태 위험에 직면했다. 제트 여객기 시장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있었다.

극복 방안 : 보잉은 제트 기술 개발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1958년, 보잉 707을 출시하며 제트 여객기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보잉 707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제트 시대를 주도하는 항공사로 자리 잡았다.


4. 1960년대 : 초음속 여객기(SST) 프로젝트 실패

위기 상황 : 보잉은 초음속 여객기(SST, Supersonic Transport) 개발을 시도했지만, 기술적 문제와 개발 비용 과다로 인해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재정적 손실이 발생하고 회사의 기술 리더십이 도전받았다.

극복 방안 : 초음속 항공기 개발 대신, 대형 여객기 개발에 주력했다. 1970년, 보잉은 세계 최초의 대형 여객기인 보잉 747을 출시하며 민간 항공 시장을 재편했다.


정리 : 지역 자원을 활용한 창업의 시사점

1. 지역 자원의 중요성

자원의 활용: 보잉은 워싱턴주의 풍부한 목재와 수력 에너지를 활용하여 초기 생산 기반 마련

인재와 기술: 지역 내 숙련된 노동력과 대학의 기술 지원이 성공의 기반. 이는 본사의 이동마다
동일하게 적용

2. 창업의 유연성과 전략

지리적 위치: 초기에는 제조 기반에 유리한 위치를 선택, 이후 글로벌 전략에 맞춰 본사를 이동

전략적 협업: 엔지니어와 전문가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

3. 현대 창업에 주는 교훈

지역 자원 분석: 창업자는 지역의 자연 자원과 기술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야 함

성장의 단계적 접근: 초기에는 생산과 개발에 집중하고, 이후 시장 확장과 경영 효율화를 도모

지역과의 상생: 지역 경제와 산업 발전에 기여하며 성장 가능성 극대화


Mootion(AI 툴)을 통한 정리 애니메이션 :

윌리엄 보잉의 보잉사 창업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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