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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Jun 28. 2022

무제

 일요일에 올리던 브런치 글은 점차 월요일로 밀리다가 이번 주는 화요일 저녁에서야 쓰게 되었다. 노트북으로 쓰기도 힘들어서 핸드폰을 붙잡고 짧게라도 써보려고 한다. 요즘 전반적인 생활 패턴들이 뒤로 밀리고 있어서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기상시간도 늦어졌다. 이번 주는 특별히 힘들 일들이 많긴 했다. 강아지의 요도에 끼인 결석 때문에 수술을 해야 했고 경과가 그다지 좋지 않다. 수술 당일에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후 이틀 동안 강아지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여전히 증상이 좋지 않아서 눈물이 많이 났다. 강아지는 여러 번 토하고, 집안 곳곳에 혈뇨 방울을 뿌리고 다녔다. 이게 최선이었을까, 다른 병원에서 다른 방법을 알아봤어야 했을까, 돈도 많이 들였는데, 아파하는 강아지를 보면 후회되고 겁이 나고 눈물이 난다.


 복직 일정이 교묘하게 맞물려서 오늘은 복직 날짜를 통보받았고, 2주 뒤 강아지 실밥 뽑으러 가는 날이 복직일과 겹친다. 마음 편하게 복직을 하기는 글렀다. 애초에 복직이 마음 편할 리도 없지만. 일을 쉬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멀쩡했던 마음은 복직일이 다가옴에 따라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지난 6개월 동안 착실히 저축해 둔 우울에 이자가 붙어 나온 것처럼, 세상의 모든 우울을 끌어모은 듯이 비극적인 마음이 된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온몸에 힘이 없고 밖에 나가기도 싫고 해야 하는 일들을 모조리 미룬다. 일을 쉬는 동안 마음이 편해져서 잘 먹고 살을 40kg대까지 찌웠는데 금방 도로 살이 다 빠질 것 같다. 그러면 체력도 떨어질 테고 힘이 없으니 의욕도 안 생기고 무기력해지고 악순환이 되겠지...


 카카오 같이가치에 안녕지수 테스트가 있는데, 나는 5년 전부터 검사를 했던 기록이 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었던 시기에는 60점대로 높은 편이었는데, 이후 취업을 한 뒤로는 계속 30점대로 낮은 점수가 나오다가, 오늘 슬픈 상태에서 검사를 해 보니 22점이 나왔다. 최근 5년 중 가장 낮은 점수가 나온 것. 삶의 의미, 즐거움에 대한 점수는 거의 0에 가깝게 나왔다. 직장에서의 생활에 대해 체념했기 때문일지도, 내 삶에 대한 모든 기대와 가능성을 체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직장 생활에서 즐거움이나 보람은 바라지도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의미나 가치 같은 높은 수준의 욕구는 체념한 지 오래이고, 그저 생존만을 위해 사는 수준까지 끌어내려진 것이다. 내 인생에서 무언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보통 사회초년생들이 직장에 정착한 직후에는 더 이상의 큰 성취가 없어서 노잼 시기에 이르게 되는 것 같기는 하다. 직장에 정착하기 이전까지 학교에서는 크고 작은 시험들을, 취준을 하면서 각종 스펙과 자격증과 또 다른 시험들을 치르며 노력과 성취를 이어 오며 지내던 삶과는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된다. 이직이라도 하게 된다면 새로운 종류의 성취를 이루는 셈일 테지만, 나는 이직이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 직종에 발을 들였다. 평생 동안 고인 물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그래서 앞날이 더욱 암담해 보이기만 하는 곳. 더 나은 곳으로의 이직이 요원해 보이자 나는 글쓰기로 눈길을 돌려 보았지만, 6개월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인지 결국 그럴싸한 성취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름대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공모전은 거의 다 탈락했다. 그거라도, 아주 작은 보상이라도 주어진다면 약간이라도 희망이 생겼을까. 살아갈 힘이 생겼을까. 그런 거 없어도 살만 하고, 아무런 성취가 없어도 즐거울 수는 없는 걸까. 어쨌든 지난 6개월의 시간 동안 결국 이룬 게 없었다는 사실에 더 우울해진 것은 사실이다. 


 내일은 병원에 가야겠다. 뭐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답답함 속에서 해방되고 싶다. 마지막 단편을 합평받던 날, 내 소설의 주인공이 '나의 해방 일지'의 염미정을 닮았다는 피드백이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염미정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나처럼 도망치지 않고, 도망치려다가 더 큰 후폭풍에 시달리지 않고, 잘 살았을까. 그렇다면 내 인생의 뒷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까.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애매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아픈지 괜찮은지 아닌지 맞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변화할 수 있을까. 찢어지는 피자치즈처럼 마음이 푹푹 찢어지지 않고도 살 수 있을까. 너무 슬퍼서 머리가 쪼그라드는 듯한 그런 감각에서 나를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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