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원 Jan 23. 2023

어쩌면 내가 직장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나만을 위한 세상은 너무 좁다



 도망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자 생존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서 도망치기만을 목표와 동력 삼아 살아왔다. 학생일 때는 졸업을 목표로, 시험공부를 할 때는 시험으로부터의 탈출, 그러니까 합격을 목표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취업 후에는 이직을 목표로, 그리고 완전히 정착할 만한 직장에 들어오고 나서는... 여전히 나는 여기에서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매일 이직 사이트를 뒤져본다. 다른 직장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만족한다는 사람을 신기하고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본다. 나는 자꾸 눈을 돌리고 한눈을 판다. 소설을 쓰면 어떨까, 코딩을 배워서 개발자가 되어 보면 어떨까, 타로를 배우면 어떨까, 상위 버전의 자격증을 따야겠다, 어학성적을 만들어야겠다... 취미 삼아서 하지만 취미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딴짓을 한다. 


 인사철이면 승진에 울고 웃고 목매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초연하게 거리를 두고 보려고 하면서, 막상 그게 내 일이 되면 나 역시 하나도 괜찮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이 좁은 세계에서 그것만이 전부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장일에 소홀하고 대충 일하며 산다면 과연 그게 나를 행복하게 할까. 직장에 어느 정도까지 내 마음을 줘야 할지 모르겠다. 직장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머물러야만 하는 곳에 마음을 완전히 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 또한 공허하다. 정말로, 공허한 일이다. 


 어제는 페미니즘 주제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확히는 밤중에 불을 끄고 누워서 책의 내용을 듣다가 잠들기 위해서 텍스트를 음성으로 듣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너무 분노가 솟구치고 속이 답답해져서 잠이 다 깨 버리고 말았지만... 그 내용 중 인상 깊은 것이 있었는데 내가 속한 직장이 여초가 되어가는 까닭에 대해서 소개한 부분이었다. 그나마 어느 부분에서는 여성친화적인 환경이라는 점, 그것이 나를 이 직장에 계속해서 머무르게 한다. 어느 정도는 평등한 관계가 가능하고 군대식 꼰대 문화가 비교적 적기 때문에(첫 직장이 극심한 전근대적 문화의 직장이었기 때문에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하고 극적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입장에서 작든 크든 어떤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눈에 보이지 않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일방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소수자와 약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자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것, 힘이 있다는 것,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나만을 위한 세상은 너무 좁다. 나만을 위한 것에 담긴 의미와 가치는 너무도 작다. 사랑을 하면 세계가 확장된다는 표현처럼. 내가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생겼을 때 비로소 사람은 강해지지 않나, 에너지로 가득 차오르지 않나. 그것이 내게 책임과 힘이 요구되는 이유가 된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하는 채로. 나만을 위한 안위에 잠겨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 채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들, 그래서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존재들에 대해서. 너무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어 폭력이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공부하고 귀 기울이고 고려하고 표현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작가의 이전글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었던 일요일 저녁의 생각 정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