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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Feb 06. 2022

한번 더 열망하기

느낌노트

1. 어젯밤 잠들 때부터 시작해 볼까. 아니, 이 글은 어차피 매일 쓰는 게 아니니까, 어제가 아니라 그제든 언제든 어느 기억을 찾아 건드려 봐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막막함이 쏟아지고 마니까 나는 다시 처음으로, 어젯밤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2. 밤이 되면 보일러를 켜고 전기장판도 켠다. 방을 따뜻하게 만든다. 수면잠옷을 입고 머그컵에는 보리차를 담아 온다. 

3. 여기는, 지금 여기로 돌아와 볼까. 여기는 햇빛이 드는 창가. 빛이 강해서 그림자도 진하다. 키보드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창 밖에는 겨울 거리가 펼쳐져 있다. 눈이 조금 쌓여 있거나 녹아서 햇빛으로 말려지는 거리. 차들이 유유히 지나다닌다. 승용차도, 버스도, 트럭도 있다. 해가 아파트의 벽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든다. 이곳은 조용한 스터디 카페다. 사람은 딱 세 명 있다. 조용하고.. 책장 넘기는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다. 내 키보드 소리는 둔탁하다. 옆에 앉은 동생의 키보드 소리는 경쾌하다. 작은 새의 부리에서 날 것 같은 소리. 

4.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은 언제든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막상 아무 거나 써, 라는 무책임한 말을 들으면 정신은 혼미해지고 점점 지루함과 지겨움과 무의미의 수렁 속으로 빠진다. 나는 다시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무리 작더라도 성취, 성취라고, 생각한다. 하나를 완성하고, 결말을 지었다는. 깔끔하게 끝이 나는 성취가 필요하다. 나는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5. 욕심이 난다. 갖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하지만 내가 도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서. 잘하면 내가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 것들, 가질 뻔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들. 그걸 갖고 싶어서 욕망한다. 

6.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게임이 있다. 스타듀밸리의 어떤 점이 그렇게 내 마음을 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 한 귀퉁이는 스타듀 밸리에 젖어 있다. 처음 스타듀밸리를 알게 된 것은 2017년이었다. 2018년도 스타듀밸리에 빠져 있었다. 우습지만 내가 직접 스타듀밸리를 플레이해본 것은 2020년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남들이 하는 모습만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까 진심이 됐나 보다. 푹 빠져 살았는데 질릴 만큼 해버리고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이제 2022년이 되었고 직접 플레이하는 게 질리긴 했지만 여전히 남들의 플레이 영상을 틀어 두거나 배경음악을 들으며 공백을 채워 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빠져들게 했을까? 개발자의 인터뷰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에게 스타듀밸리란 하나의 예술이고 그것은 자신이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건 너무나도 공감되는 말이었다. 내가 쓰는 작품이 진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해 주리라고 믿었다. 일상에서 그 어떤 식으로도 나타내지 못하는 나의 깊숙이 숨겨진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 나는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다. 

7.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햇빛이 구름 뒤로 숨었고 내부는 싸늘해서 발이 시리다. 기모 바지 안에 기모 스타킹까지 껴입었지만 추운 건 추운 거다. 추운 건 추운 거고 그럼에도 아이스는 마셔 줘야 하는 거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사 왔다. 선물 받은 기프티콘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달하고 또 마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가끔 놀랍게 따뜻한 일이 된다. 

8. 다시 어젯밤으로 돌아가 볼까. 밤에는 눈이 잘 건조해진다. 낮에 비해 확실히 건조하다. 낮에는 인공눈물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밤에는 인공눈물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아서 자주 나를 주눅 들게 하는데 얼마 전에는 처방받아서 사는 인공 눈물이 훨씬 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럼 지금까지 나는 뭘 했던 거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기쁨보다는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하는 슬픈 마음이 크다면. 

9. 그런 식으로 자책하며 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지. 

10. 내가 바라마지 않던 휴식기를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비겁하다는 생각, 미숙하고 유치하며 형편없다는 생각, 나약해 빠졌다는 생각,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빠져 우울했다. 밤이 되면 우울하고 불안해서 맨 정신으로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자꾸 유튜브를 보거나 웹툰을 보거나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주의를 분산시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때는 그 빈 공간을 우울과 불안이 메우려 들었으므로. 

11. 내 인생 이야기의 작가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오래전 던져버렸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과거의 열망이 순수했던 이유는 바라는 대로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지금의 내가 그런 것들을 비웃게 된 이유는 결국 그것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2. 그럼에도 다시 희망을 갖는 일, 다시 열망하고 기대하는 일, 다시 소망하고 노력하는 일, 믿음을 갖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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