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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May 16. 2022

내가 혐오하는 것이 나를 혐오하는 것이 될 때

일상과 분노와 투사에 대한 생각들



 지난 주말에는 많이 걸었다. 만 보 넘게 걸은 것은 오랜만이다. 날씨가 좋아서 걸을 맛이 났다. 동생의 자취방 근처에는 예쁜 카페들과 가게들이 많다. 근처의 대학교 후문 골목까지 걸었다. 여유로운 오후의 공기는 느슨하다. 주말의 대학생들은 넉넉한 티셔츠에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천천히 걷는다. 그 사이로 걷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진다. 햇볕을 쐬면서 많이 걸어서인지 저녁부터 잠이 쏟아졌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쉬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인지 월요일 아침이 산뜻하다. 아침에는 따뜻한 물에 오래 씻고 머리를 말리고 집 밖으로 나섰다. 유효기간이 하루 남은 커피 쿠폰으로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 왔다. 헤이즐넛 시럽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맘껏 마실 수 있으니 좋다. 커피를 들고 스터디 카페에 와서 창가 자리에 앉는다. 스터디 카페 창문 너머로는 야트막한 뒷산이 보인다. 정수장이 있는 언덕인데 이쪽에서 바라보면 밝은 초록빛의 텔레토비 동산처럼 보인다. 언덕 꼭대기에는 수박바 모양의 침엽수들이 몇 그루 줄지어 있다. 청량한 곡들이 이어지는 플레이리스트의 배경 화면으로 쓰기 좋을 만한 풍경이다.


 오월의 햇빛은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아서 좋다. 서늘한 바람과 따뜻한 볕의 조화가 좋다. 볕이 데워 준 자리를 바람이 식혀 준다. 원래 오월 중순쯤 되면 더워서 반팔을 입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아직도 덥지 않다. 언제쯤 반팔을 개시하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 더운 여름이 되면 슬슬 모기들도 등장할 테고, 밤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로 귀가 따가워질 것이다. 여름이면 새벽 내 개구리와 풀벌레들이 울다가 잠잠해지기고 그러다가 다시 한 마리가 울기를 시작하면 나머지들이 동시에 따라 울기 시작하고 그 소리들이 새벽안개처럼 짙게 공기를 메울 것이다.


 요즘은 조급함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 조급한 마음으로 지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느리게 걷고 차분히 음미해 보려고 한다. 햇볕과 커피와 오후를 만끽하고,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즐기면서. 그렇게만 지내도 충분할 것 같다. 좋아하는 것들을 넓혀 가고 싶다. 싫어하는 것들에는 조금만 더 너그러워지고 싶다.


 나는 스스로가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고, 인간관계에서 사소한 지점에서도 쉽게 기분 상할 때가 많다. 얼마 전 새삼스럽게 '투사'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투사'란 자신이 지닌 어떤 속성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타인의 어떤 면을 싫어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 본인에게 그런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혐오는 자기혐오로 이어지기 쉽다. 혐오하는 타인의 모습에는 무의식이 온 힘을 다해 억누르는 내 모습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타인의 속성들을 내게서 억압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고, 그런 속성이 보일 때마다 내게 모진 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안 그러려고 참고 있고 부단히 애쓰고 있는데 너는 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 네 멋대로 사는 네가 정말 혐오스러워', 와 같은 과정이었다. 그 모든 '혐오스러운' 부분을 얼마간은 인정하고 허용해줄 필요가 있었다. 나를 수용하고, 내 모습 그대로를 허용해 주고, 그래도 된다고 안심시켜 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속성, 내가 싫어하는 나의 부분들, 내가 억압하고 숨기고자 하는 면들을 인식하고 인정해 주는 것. 내게 허용적이 될 때 타인에게도 진심으로 허용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 소모를 멈출 수 있다. 허용하는 순간, 그동안 참고 억누르는 데 써 왔던 에너지들이 확 줄어든다. 진짜 필요한 곳에 쓸 에너지가 많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다짐해 봐도 일상생활에서 훅훅 들어오는 온갖 불쾌한 자극들 앞에서 너그러워지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내용을 쓰고 점심을 먹으러 다녀온 잠깐 사이에도 내 정신을 뒤흔드는 불쾌한 일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 마음을 인식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과정들에 빠져들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하는 연습을 하는 건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만 더 너그러워지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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