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전 또 다른 나와 그.
RRS 2013 - 나 이전 또 다른 나와 그.
2025.05.15
write by Funking
1. 나 이전 또 다른 나와 그
그는 나와 같은 모델을 이미 타고 있었다.
검은색, 나보다 조금 이른 연식.
도장면이 빛을 흡수하듯 어두운 SUV,
고요한 산길에서 오디오 대신 사색을 듣던 차.
그 차는 오래전부터 그의 일부였다.
그가 즐기는 캠핑, 아내와의 말다툼 후의 침묵,
가끔은 목적 없는 바다와의 하룻밤.
그 모든 풍경 속에 그 차가 있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은 달랐다.
12월 초, 짧아진 해.
오후 6시, 어둠은 이미 풍경을 삼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옛 지인들이 강가에서 캠핑 중이었고,
그는 초행길을 더듬으며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강가 따라 직진하면 돼.”
호의였지만,
그가 들어선 길은 얕은 물길이 아닌,
깊고 조용한 강물로 이어져 있었다.
지도 위의 흰 선은 현실의 물줄기 앞에서 무력했고,
내비게이션도, 헤드라이트도,
그의 피로조차도
어떤 경고도 되지 못했다.
나는 그의 발끝이 밟는 대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강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조용한 침묵.
차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가라앉았고,
그는 비닐봉지를 찾아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휴대폰을 꽁꽁 싸서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침수되며 자동으로 열린 창문.
그는 찬물 속으로 몸을 밀어내듯 빠져나왔다.
헤드라이트는 여전히 켜져 있었고,
강물은 천천히 엔진룸을 삼켜갔다.
뒷좌석 창문 안쪽엔 캠핑 가방이 떠다녔고,
운전석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그는 울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젖은 바지를 벗어 물기를 짜내고 다시 입었고,
지인들이 건넨 여벌 옷 덕분에
저체온증도 피할 수 있었다.
차는 그 자리에 남았다.
밤이 깊을수록 물속은 더 깊어졌고,
긴급출동 차량도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
크레인이 달린 붐대차량과
두 대의 레카가 함께 와서야
나는 강에서 끌려 나올 수 있었다.
바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던 그 순간,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날 밤 그는 지인의 텐트에서 잠들었고,
다음날, 다른 차의 조수석에 앉아 귀가했다.
사람들은 ‘다행’이라 말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에게
조용한 장례식과도 같았다.
며칠 뒤, 폐차가 결정되었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는 또다시 나를 찾기 시작했다.
물속에 잠긴 나의 유령이 아닌,
그 시절의 나와 닮은 또 하나의 ‘RRS’를.
TBC
20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