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S2013

나의 탈출 속도는 그가 짊어진 무게에 비례한다

by 묵혼 김태완


제5장. 나의 탈출 속도는 그가 짊어진 무게에 비례한다



Written by funking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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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침은 늘 같다.


04:50.


05:00에 울릴 알람보다 먼저, 그는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알람을 끈다.


미지근한 생수 한 잔을 들이켜고, 현관을 열어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1층. 담배 한 개비.


조용히, 천천히, 하루의 첫 호흡을 내쉰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출근 준비를 마치면 그는 곧장 내게 온다.


우리는 어둠을 뚫고 옥천으로 향한다.


그는 말한다.


이 시간, 출근길이 하루 중 가장 좋다고.


주말 내내 신나게 놀고 난 뒤, 월요일 새벽 출근길이 일주일 중 가장 편하다고.




정각 6시. 회사 앞 골프연습장에 도착해 한 시간가량 클럽을 휘두른다.


이른 출근한 품질팀 윤 과장, 포장출하반 최 주임, 도금업체 박 부장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종이컵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자재 재고현황 리스트를 손에 든 채 공장동을 돈다.


그리고 후문으로 나가 또 한 개비의 담배.


그렇게 그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처음엔 지원팀, 그다음엔 품질팀, 원가자재팀, 최근엔 생산팀도 맡았다.


지금은 다시 원가자재팀.


월말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엔 피로가 짙어진다.


그의 자리는, 욕먹기 가장 좋은 자리다.


적자가 나면 자재 과잉 매입 탓,


정상 매입을 해도 원가가 높으면 불만은 그의 몫이다.


그는 매입도, 매출도 책임진다.


자재팀이자 원가팀, 영업이자 관리다.


중소기업의 단면이다.




사무직 구성은 단출하다. 생산팀, 품질팀, 그리고 그가 홀로 이끌어가는 원가·자재·영업·관리팀.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혼자 여러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폴리매스적인 성향,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 누구와도 관계를 맺는 능력.


그는 스스로의 성향을, 다행이라 여긴다.




전쟁 같은 주중이 끝나고 주말이 오면,


그는 아무 말 없이


캠핑 장비를 싣고


우리는 도시를 벗어난다.


그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지만,


가속페달을 밟는 발끝에


미묘한 해방감이 실려 있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가속이 부드럽게 붙을수록,


그가 조금씩 내려놓는 걸 느낀다.


우리는 종종 바다가 보이는 공터에 멈춘다.


엔진을 끈 뒤에도 그는 한참을 내 안에 머문다.


창문 너머 파도 소리, 차 안의 고요.




그런 순간, 나는 깨닫는다.


나는 단순한 ‘차량’이 아니다.


나는 ‘공간’이다.


그가 잠시 책임을 내려둘 수 있는 방.


일터에선 다층적 역할을 수행하는 직장인이지만


이곳에선 숨을 쉬는 아버지고, 남편이고,


말없이 있어도 괜찮은 중년의 사내다.




그는 가끔 내게 말을 건넨다.


여행은 일상과 모험의 중간쯤이라고.


여행을 떠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두려움과 대담함의 합이 용기라면,


그가 말하는 여행은 비겁하지도, 무모하지도 않다.


일상을 떠나 모험으로 나아가는 여정.


삶이 행복해지려면, 그런 모험이 있어야 한다고.


누군가는 여행이 모험에서 일상을 빼는 일이라 말하지만,


그는 그 반대다.


일상에 모험을 더해 여행을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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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탈출은 도망이 아니다.


그건 충전이다.


버티고, 다시 돌아가기 위한 준비다.


그래서 나는 전력으로 달린다.


그가 느낄 수 있도록.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내 속도로.




어쩌면 나는


그가 묵묵히 감당해 온 무게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그 무게만큼의 속도로,


그 책임만큼의 조용한 위로로,


나는 그와 함께 달린다.




그 순간, 나는 안다.


그에게 나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그는 말했다.


“이 차는 아직도 믿을 수 있어.”




그 말은,


나에게도 그가 여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의 쉼은 침묵이고,


나는 그 침묵을 실어 나르는 차다.




그와 나의 길은,


여전히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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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SQ, IATF16949



이번에는 회사 이야기.




나는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일한다.


자동차의 머리받침, 그러니까 ‘헤드레스트’를 만드는 회사다.


뒷좌석에서 졸다가 고개 푹 떨어뜨려본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부품인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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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동안 맡았던 일은 품질 관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고객사에서 요구하는 온갖 기준을 맞추기 위해


우리 회사가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 검사하고, 또 그걸 증명하는 일이다.



이 업무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 두 가지가 있다.


SQIATF 16949.


처음 들으면 무슨 비밀 암호 같지만,


사실 둘 다 ‘믿고 탈 수 있는 차를 만들기 위한 장치’다.



SQ는 Supplier Q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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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협력사 믿을 만한가요?’를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이 회사, 납기는 잘 지키고?”


“불량은 안 나?”


“문제 생기면 피하지 않고 책임지는가?”


이런 질문에 스스로 답을 준비하는 게 내 일이다.


아니, 가끔은 묻기도 전에 먼저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IATF 16949.



이건 자동차 산업 글로벌 품질경영의 표준 메뉴판이다.


"이 부품은 어떤 공정에서, 어떤 조건으로 만들어졌나?"


"만약 문제가 생기면, 어디서부터 되짚어야 하나?"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반복 가능하게 만드는 규칙이다.


쉽게 말하면, ‘재현 가능한 신뢰’를 쌓는 시스템이다.


물론, 현실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수많은 회의, 각종 문서, 심사 대응, 불시 점검, 무한 재점검...


가끔은 ‘이걸 왜 사람이 해야 하지?’ 싶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래도 이 시스템이 없다면,


‘고속도로 위의 신뢰’도 없다.



작은 볼트 하나,


보강용 와이어 하나에도 책임이 붙는다.


그 책임이, 내가 매일 출근하는 이유다.




물론... 가끔은


“내가 만든 건 아니고요… 공급처가…”로 시작하는 변명 보고서도 쓰지만,


그조차도 품질관리의 일부다.


우리는 실수까지 품질로 관리한다.



그리고 어떤 날은… 소설을 창작해야 한다.


같은 불량이 재발했을 때는 특히 그렇다.


분명 지난번 개선대책서에 “유효성 있는 대책 수립 완료”라고 당당히 썼는데,


그 똑같은 불량이 또 나타나면?


그 순간부터는 현실이 아니라 창작의 시간이다.


어떻게든 원인을 비틀고, 대책을 그럴듯하게 써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같은 불량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심사관 앞에 낼 수 있으니까.




가끔은 생각한다.


이 정도면 노벨문학상 후보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고.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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