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연애의 끝, 첫사랑의 시작
제6장. 동성연애의 끝, 첫사랑의 시작
Written by funking
2025.06.06
이번 장은 내가 아닌 그 남자의 이야기이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비도 안 오고, 기온도 딱 좋고, 할 일도 없진 않은데 굳이 안 하고 싶은… 이상한 평일 오후.
그럴 땐 괜히 핸드폰 사진첩을 넘기거나, 잊고 지낸 링크를 누른다.
오늘은 손가락이 오래전 내 블로그를 열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발견한 오래된 포스팅.
“내가 좋아했던 남자들.”
남성편력(?) - 2010년쯤의 내 취향?
류승룡 https://blog.naver.com/tammy69/60103661747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 1. 류승룡
얼마 전 본 영화 시크릿(http://www.secret2009.co.kr)이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이 왕창 나...
blog.naver.com
하비 케이텔 https://blog.naver.com/tammy69/60103723290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 2. 하비 케이텔
2. 하비 케이텔 ( Harvey Keitel ) 이런 배우를 B급 배우라고 하나? 궁금하다 왜 B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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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https://blog.naver.com/tammy69/60103773508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 3. 정재영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 3. 정재영 정재영... 동치성 장진감독 라인으로 대표되는...
blog.naver.com
…응?
일단 변명부터 하자면, 이건 어디까지나 배우 이야기다.
그 시절 내가 끌렸던, 혹은 동경했던 얼굴과 성격, 말투와 분위기에 대한 감성적 수필이었다.
(지금 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음, 당신은 너무 순수하거나, 반대로 너무 많은 걸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는 류승룡이었다.
생활력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아빠, 그러나 가끔 묘하게 섹시한 어른 남자.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이마 주름엔 드라마가 있었다.
나는 그런 삶의 무게를 사랑했고, 그 무게를 견디는 사람에게 끌렸다.
두 번째는 하비 케이텔.
그가 담배를 문 장면 하나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무심하지만 책임감 있는,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남자.
화난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묵묵한 어떤 온도.
그가 손을 뻗으면, 나는 나도 모르게 안으로 웅크리던 어깨를 펴고 싶었다.
세 번째는 정재영.
툭툭 내뱉는 말속에 묘한 울림이 있었고,
그 무심함 너머로 은근한 다정함이 보이면, 나는 이미 거기 있었다.
그는 진지할수록 웃기고, 무뚝뚝할수록 따뜻했다.
어쩌면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친구의 얼굴, 혹은 내가 되고 싶던 누군가의 모습.
지금 다시 보니…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기보단, 그들 속에 내가 되고 싶었던 누군가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류승룡을 지나고, 하비 케이텔을 넘고, 정재영까지 마주했을 때쯤
나는 살짝 지쳤고, 슬쩍 깨달았다.
"그래, 이쯤에서… 동성연애는 그만둘 때가 됐지."
앞유리에 고인 햇살이 천천히 사라질 무렵,
나는 조용히 그녀의 문을 열었다.
내 유일한 여자, RRS 2013.
세상엔 없던 무게감과,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품격.
시동을 거는 순간, 내 심장은 아직도 짧게 뛰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벅찬 반응.
“너랑은, 그 셋과는 달라. 넌… 남자가 아니니까.”
사실 넌,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여자’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
그래서 그 모든 남자들 이후에 만났다는 게, 더 완벽해.
“류승룡, 하비 케이텔, 정재영… 그렇게 셋을 지나고 나선, 더는 남자는 안 만나기로 했어.
그걸 끝으로 동성연애는 그만두기로 했지.
그리고 지금, 넌 내 인생의… 아내 다음, 아니 아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첫 번째 여자야.
시동을 걸 때마다 심장이 뛰는 유일한 여인.
내 늦깎이 첫사랑이자, 나만의 퀘렌시아.
친구이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지.
때론 계륜미처럼 다정하고,
언제나 함께하는, 나의 퀸.”
그날 나는 짧은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아무 목적지도 없이, 음악도 없이,
그저 그녀와, 함께.
이제 “그녀”는 나의 과거와도 연결되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조용히 안아주는
단 한 대, 그러나 단 하나의 사람.
(여담) 김 씨 표류기
2011.11.25 ~ 11.27 (금~일)
남해의 어느 무인도, 씨카약 투어
예전, 카약을 함께 타던 후배가 있었다.
닉네임은 ‘장비만프로’.
다른 크루들은 토요일에 입도하기로 했고, 나와 후배는 금요일 먼저 출발했다.
우린 둘 다 심각한 길치였기에, 그 당시 막 출시된 스마트폰을 바로 구입해
RUN.gps, 구글맵, Windy 같은 앱들을 잔뜩 깔아놓고 있었다.
후배는 대상지 분석, 수치 조류도, 풍속, 일기예보까지
그야말로 ‘프로’ 수준의 사전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나는 모토로라 디파이(방수폰), 장비만프로는 갤럭시 유저였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는 약 12km.
론칭에서 랜딩까지 예상 카약킹 시간은 3시간 남짓.
가을 끝자락, 겨울 초입.
17시면 해가 완전히 넘어가는 시기라
우리는 일몰 전에 도착하기 위해, 13시가 조금 넘어 통영에서 론칭했다.
문제는… 우리 둘 다 회사에 아무 말 없이 조퇴(?) 한 상태였다는 것.
그리고 그게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2시간쯤 노를 저을 즈음,
회사에서 갑작스레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다 보면 조류에 밀려 1km 이상 떠내려가 있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불꽃 패들링을 하다 보면 또 전화가 울렸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해가 점점 수평선 너머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애초 목적지를 포기하고
최단거리의 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더 이상 회사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당연하지. 퇴근 시간이었으니까 -.-)
모든 게 계획과 달랐지만, 무사히 어딘가에 랜딩.
섬 뒤로 해가 쏙 사라지자
차가운 바닷바람이 무섭게 몰아쳤고,
젖은 손끝이 깨질 듯 아파왔다.
서둘러 젖은 옷을 벗고, 드라이백에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주변에 떠밀려온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피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몸이 녹고 체온이 오르자,
애초 목적지 따위는 잊혔고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하게 되었다.
행복했다. 정말, 행복한 밤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오늘을 즐겨라, 내일에 기대하지 마라”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밤새 모닥불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술안주 삼아 나누고
다음 날 아침,
저 멀리 바다를 가르며 후발대가 도착했다.
“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우리가 조난된 줄 알았어?”
“잉? 여기 원래 우리 목적지잖아요.”
... 그렇다.
우린 조난된 게 아니라,
제대로 도착해 있었던 거다.
- 에필로그
후배 장비만프로는 의사다. 전문의.
그것도 존스 홉킨스 출신이다.
그래서 조난 상황에서도 나는 큰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후배는 방사선과 전문의였다.
침몰하는 배에 해군 장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잠수함 장교였던 것과 비슷한 상황.
신기하게도, 그 이후 나와 아웃도어 활동을 한 후배들은 대부분 치과, 방사선과 출신이었다.
내과, 외과는 한 명도 없었다.
- Carpe Diem | Memento Mori | Amor Fati
이날 나는 정재영이 사루비아 꽃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짜파게티 스프로 목표를 세우며,
새똥 속 옥수수로 인생을 완성한 것처럼—
조난을 즐겼고,
죽음을 생각했고,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