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문지는 리마 시내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우아카 푸쿠야나 고고학 박물관이었다. 서기 200~700년 흙벽돌로 만든 계단형 피라미드로, 고대 문명의 활동 중심지였다. 흙벽돌로 쌓은 건물이 이렇게 오래 보존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유적지 부근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리마의 과거와 현재가 대비되어 역사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아르마스 광장으로 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리마 역사지구의 중심부로 대통령궁, 대성당, 리마 대주교궁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성당은 1546년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가 직접 성당의 주춧돌을 놓아 지었다고 한다. 이 성당에 피사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니 페루 입장에서는 정복자를 기념하는 곳이 된 것 같아, 역사의 아이러니를 체감했다. 대성당 내부는 종교예술박물관으로 종교 관련 서적과 의상, 16~18세기에 수집된 25,000여 권의 장서와 미술품 등이 전시 및 보관되어 있다. 놀랍게도 약 7만 명의 유골을 원형으로 배치한 ‘카타쿰바’라고 하는 지하묘지도 있었다. 미로 같은 지하의 탁한 공기와 냄새가 상당히 불편했다. 하늘로 오르지 못한 영혼들이 뒤엉킨 냄새 같았다. 성당 밖 광장에서는 잉카문명의 재현인 태양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전통음악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의 화려한 색감과 독특한 문양의 의상이 눈길을 끌었다. 그때 한 소녀가 서툴지만 엄연한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하며 다가왔다. 검은 뿔테안경을 끼고 웃는 모습이 순한 양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말을 익혔단다. 반가워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여 기념으로 남겼다.
여행자들과 페루의 젊은이들이 모인다는 라르코마르 해변 ‘사랑의 공원’에 갔다. 이 공원에는 태평양을 배경으로 남녀가 키스하는 동상이 유명한데 여기에서 키스하면 사랑이 영원하다고. 내가 보기에는 키스하는 형상이 너무 노골적이고 투박해서 몽글몽글한 설렘이 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행들과 동상 흉내를 내며 유쾌하게 사진을 찍었다. 사랑의 공원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다 아래를 보니, 아득한 절벽이다. 절벽 높이는 물경 100m라고 한다. 절벽 아래의 말발굽처럼 둥글게 생긴 해변과 휴식하는 사람들과 절벽에 핀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다. 해 질 무렵, 태평양 노을은 모든 것을 물들였다. 그 실루엣을 배경으로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곁들였다. 하얀 거품처럼 부푼 여행의 꿈을 꿀꺽 넘기는 순간, 나는 인생의 멋을 아는 근사한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이카로 가는 중에 자그마한 해변마을에서 쉬어 점심식사를 했다. 튀긴 옥수수의 고소한 맛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갑자기 왁자지껄 환호성이 들렸다. 열정적인 아가씨들의 길거리 공연이었다. 빨간색에 프릴로 장식한 원피스를 입고 빠른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춤사위는 가히 관객들을 홀릴 만했다. 길거리의 자유로움과 무용수들의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감동을 더했다. 남미 드럼박스 카혼의 리듬이 저 깊은 곳에 숨겨 둔 흥까지 끌어냈다. 리드미컬하고 단순한 리듬이 듣는 이의 심장을 뛰게 하는 강력한 마력이 있었다. 카혼 연주와 무용수들의 흥돋는 몸짓에, 저절로 비트 타는 관객들의 환호성은 혼연일체가 되어 온 세상을 덮고도 남았다.
와카치나에서는 사막 질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내몽고 자치구의 옥룡사호 사막을 달려보기는 했으나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첩첩이 싸인 누런 사막언덕 등성이는 오직 바람과 모래뿐, 그 속으로 모든 것이 묻힌 듯 했다. 엎드려서 거꾸로 질주하는 샌드보딩에 도전하지만 예상을 뒤엎는 결과에 통쾌하게 웃었다. 끝 간데없는 모래언덕의 찬란한 노을에 감탄사를 연발하다 자연의 위대함에 숙연해졌다. 노을을 등지고 사막을 내려오니, 오아시스 마을이 오를 때 느끼지 못했던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막언덕과 마을 불빛의 조화라니! 불빛이 둥근 오아시스 마을 모양을 선명하게 그리며 오아시스 물속에 마을을 하나 더 그려 넣고 있었다. 숙소마저도 이 아름다움에 손색없는 멋진 곳이어서 하루 일정을 이국의 정취에 심취되어 마무리하게 되니 여행자의 마음은 더욱 설렜다.
드디어 나스카 라인 경비행기 투어 날이다. 지상 1,500피트 이상 상공에서만 그림 전체를 볼 수 있다니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다. 멀미가 걱정되었다. 경비행기는 나스카 라인을 따라 곡예하듯 날았다. 고지대 척박한 곳에 크기가 300m라는 큰 새의 좌우 대칭과 특징을 어떻게 잘 살려 그렸는지 경이롭기만 했다. 기체 아래에 새 모양 같은 경비행기 그림자가 우리와 똑같이 움직이니 동지를 만난 듯 반갑다. 높은 설산의 웅장한 안데스산맥을 보니 페루의 지형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기내 방송 안내에 따라 17개의 그림 찾기에 몰두한 영향인지 멀미를 잊고 무사히 비행을 마쳤다.
리마로 돌아와 세계의 배꼽을 의미하는 잉카제국 수도 쿠스코로 왔다. 쿠스코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막연하게 품은 동경이 더욱 흥미를 당겼다. 잉카는 ‘다스리는 귀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쿠스코에도 아르마스(Armas) 광장이 있고 그 안에 대성당이 있다. 광장에는 잉카 대국의 기초를 다졌다는 황제 파차쿠텍의 화려한 동상이 있었다. 동상 아래 분수가 흘러내리고 사람들이 의자에 쉬고 있는 모습이, 마치 황제가 자신의 후손들에게 물소리를 들으며 고단한 일상을 쉬어가게 하는 것 같았다. 광장을 거닐다 고산병에 좋다는 코카잎차와 음료수를 구입했다. 고도 4,260m에 적응하기 위해 미리 고산병 약도 복용했다. 급하게 걸으니 숨이 찼다. 천천히 휴식하면서 산책하듯 시내를 둘러보라던 가이드의 말이 자분자분 다가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이름이 재미있는 꼬리칸챠에 도착했다. 황금사원이라는 뜻을 가진 잉카유적지다.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으로 잉카제국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신전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수많은 잉카의 건축물들을 파괴하고 남은 잉카의 거대한 돌담 위에 스페인식 건축물들을 올렸다. 이후 대지진으로 스페인식의 건축물들은 무너졌으나, 잉카시대의 기단과 벽 일부가 남아 당대 석축기술의 뛰어남을 증명해주었다. 그들은 여기 꼬리칸챠에도 산토도밍고 성당을 세웠지만 파괴되어 재건축했다. 꼬리칸챠 2층에서 멀리 시선을 두니 쿠스코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이 들어온다. 페루 역사의 현장에 이방인으로 서 있는 내가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작은 조약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꼬리칸챠를 나오니, 원주민 복장을 하고 알파카를 안은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유료로 알파카를 안고 사진을 찍으라는 것이다. 알파카와 둘이 찍으려 하니 아주머니도 자연스레 앵글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진 골목길을 걸었다. 건축물 중에서 유명하다는 12각 돌을 보기 위해서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들을 다듬어 엇갈리게 맞물려 축조한 기술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 명함 한 장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끝내 12각 돌은 찾지 못했다. 찾아본 것 중 최대가 8각 돌이었다. 그래도 만족했다. 8각을 깎아 치밀하게 돌담을 쌓아 대지진에도 견디게 한 기술과 지혜만으로도 감동이니까. 건축물뿐 아니라 골목길 돌들도 섬세하게 놓아져 있었다. 오가는 후손들의 발길에 닳아져 매끈하고 빛이 났다. 앞으로도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남을 것 같다. 할머니가 골목길 대문간에 알록달록 곱고 앙증맞은 잉카 수공예품들을 펼쳐놓고 선택을 기다리지만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심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쉬지 않고 실을 다듬는다.
다음 코스는 쿠스코보다 고도가 낮은 우루밤바. 가는 도중 휴식시간에 천연염색 가게에 들렀다. 바구니마다 색색의 털실이 담겨 있었다. 염색이 된 털실과 그 털실 염색제로 쓰인 재료를 보기 좋게 진열해 놓았다. 한갓 풀이고 나뭇가지이며 열매인 그 속에서 어떻게 저런 오묘하고 예쁜 색이 나올까 신기했다. 천연염색실로 짜 놓은 옷, 숄, 깔개 등의 작품이 전시 판매되고 있었다. 그새 쿠스코 문명에 동화가 되었을까. 평상시 같으면 원색에 거부반응이 났을 것 같은데, 그곳에서는 그저 예쁘기만 했다. 쿠스코 골목길에서 무심이 지나쳤던 할머니 수공예품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풀고자 기념품을 샀다. 염색제품 외에도 온갖 씨앗들과 농기구들도 있었다. 농기구들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짐작이 갈 만큼 우리 농기구와 흡사한 걸 보며, 어디서나 먹고사는 방법은 비슷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한 귀퉁이 철장 안에 꾸이(기니피그) 세 마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포동포동 귀여워 인사를 했다. 에구, 식용 가축으로 기른다고 하니 왠지 애잔했다. 아가씨에게 사진 찍기를 요청했다. 어머니와 함께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치마를 살짝 넓혀 잡는다. 성의 있게 포즈를 취해주는 센스가 돋보였다. 양 갈래 머리에 수줍게 웃던 소녀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았다. 어느새 해는 넘어가고 남은 잔영이 산 아랫마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제 곧 이 빛마저도 거두어갈 것이었다. 어두운 밤길을 더듬어 숙소에 도착했다. 해발 2,600m였다. 쿠스코보다 낮은 곳에서 고산병 증세로부터 심신을 안정시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