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봄은 미미하였으나 겨울은 창대할 수 있다
저강도 정책을 쓴 스웨덴이나 중강도의 일본이나 고강도의 한국이나 겨울로 접어들며 모두 코로나 확산세를 피할 수 없었다. 방역 정책과 관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코로나 재확산만을 이유로 누군가를 탓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현재 코로나 재확산의 불길 속에 있고, 미국의 정은경이라 할 파우치 소장은 12월 27일 CNN 인터뷰에서 아직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불길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예감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3월 23일 중앙임상위원회 기자회견에서 오명돈 위원장은 겨울이 오면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게 될 것이며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규모도 클 것이라 말했다.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의심이 들면 유튜브를 클릭해보시라. 실제로 1918년 유행하여,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1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의 경우도 1차 웨이브보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발생한 2차 웨이브에서 5배나 더 큰 확산세를 보였다. 사실 중앙임상위가 완화 정책으로의 전환을 제안한 배경에는 겨울로 접어들면서 코로나 유행이 다시 시작되고 확산의 규모는 전보다 클 것이라는 예측이 깔려 있었다. 경제 위기가 닥치면 일찍이 이를 예언한 경제학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과 비교하면 조용하다. 코로나의 공포 담론은 우리의 사회적 기억에 대한 거리두기에 성공한 셈이다.
하나의 예언이 맞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해법이 항상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예언이 맞다고 할지라도 처방이 같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에 대한 방역은 복잡한 함수다. 한 축은 보건의료적이면서, 또 다른 한 축은 사회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에 걸리는 것보다 ‘확진자’가 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확진자란 무엇일까? 확진자란 다만 몸 안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지니고 있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는 ‘Confirmed Case’다. 확진자란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확진’을 받은 사람이다.
확진된(confirmed) 순간 우리의 몸은 보건의료적 신체에서 사회적 신체로 바뀐다. 우리의 두려움의 일부는 바이러스의 담지자인 나의 ‘몸’이 다른 누군가를 검사 대상자로 만들거나 격리시키며, 누군가의 영업장을 닫게 만들고, 누군가의 채용 시험에 대한 응시 권리를 박탈시키는 원인제공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리적이며 자연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사회적 과정이다. 나의 실수일 수도 있고, 나의 부주의일 수도 있다. 내가 매우 조심을 했다지만, 더 조심을 하지 않은 나의 책임일 수도 있고, 생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사람들을 접촉할 수밖에 없는 나의 경제적 처지나 나의 무능함 때문일 수도 있다. 사회적 실패이면서 동시에 개인적 실패이기도 하다. 전파력이 강한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사회적 시선과 규율은 우리를 자책하도록 만든다. 죽음을 통해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문학상을 줄 기회를 빼앗은 미국의 작가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 ‘네메시스’에서 캔터 선생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폴리오(소아마비)로 주변 사람들이 감염된 것을 자책하듯이.
억제적 방책은 다만 바이러스의 억제만을 뜻하지 않는다. 심리적이며, 사회적이며, 경제적이며, 관계적인 억제가 함께 작동한다. 억제는 일종의 비용이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아깝다고, 기름을 너무 많이 쓴다고, 혹시나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적이 다가오는데 움직이지 않는 군대가 있을 수 있을까? 방역은 ‘저강도의 전쟁’이라고 한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질병 앞에서 이런 비용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한쪽에서는 자영업자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경제를 위해서 억제책을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방역이냐 경제냐가 가장 단순화된 코로나 시대의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두 가지 ‘살기 힘들다’가 맞선다. ‘병에 걸려 살기 힘들까 봐’와 ‘먹고살기 힘들다.’ ‘민주냐 경제냐’와 닮은 쌍둥이다. 그렇다면 너도 나도 한 마디씩 얹을 수 있는 '쉬운' 문제다. 풀어야 하느냐와 막아야 하느냐. 하지만 현실적인 답은 어느 정도 막고, 어느 정도 풀어야 하느냐다.
답을 찾으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내거나 아니면 얼마나 위험한지 판단하거나 또 아니면 얼마나 위험한지 합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