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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 프란치스코 Dec 31. 2020

장르극, 코로나19

9.  코로나와 휴리스틱

 올해 치러진 고등학교 6월 모의고사 영어 문제에 ‘availability heuristic’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지문의 주제이자 핵심어였다. 굳이 시험지 글을 인용하는 이유는 번역이 쉽지 않은 ‘availability heuristic’이라는 단어의 뜻풀이가 첫 문장에 나오기 때문이다. ‘머리에 쉽게 떠오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거나 대세라고 생각하는 흔한 잘못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소개한다. 휴리스틱(heuristic)은 번역하지 않고 그냥 쓰는 경우가 많은데 굳이 직역을 하자면 추단이다. 추단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미루어 판단한다는 뜻이나, ‘가용성(availability)’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이다 보니 휴리스틱 자체만으로도, 복잡하고 어려운 마음의 과제들을 간단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종종 사용된다. 전염병 등 위험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연구하는 '위험 인식'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 폴 슬로빅도, 종종 이 분야의 교과서처럼 쓰이는 ‘위험판단 심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단이 어떤 상황에서는 타당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크고 지속적인 편향을 유도하여 위험 평가에 심각한 손상을 줄 수 있다’고. 위험지각에 있어 대표적인 추단이 가용성(availability)인데 이 두 가지가 결합된 단어다. 가용성(availability)은, 다시 말하지만, ‘머리에 쉽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 시절에 참 적절한 지문이다.


 코로나에도 ‘availability heuristic’이 개입되지 않았을까? 앞서 소개한 폴 슬로빅의 책에도 사람들이 종종 잘못 생각하는 오류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살인이다. 살인이 뉴스에 종종 등장하다 보니 사람들은 살인에 의한 사망이 다른 어느 것보다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우리 예를 가지고 말해보자. 살인과 자살 중 어느 쪽이 사망자가 더 많을까? 사람들은 살인이라고 믿는다. 실제는 압도적으로 자살이 많다. 2019년 우리나라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살인으로 죽은 사람은 408명이지만, 자살로 죽은 사람은 13,799명이다. 33배가 넘는 차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에게는 살인의 추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뉴스와 영화와 ‘그알’과 당신이 탐닉하는 추리소설까지.  


 앞서 코로나가 우리 사회의 세 가지 경험 위에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중 두 가지가 감염병이었다. 기억의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아 ‘머리에 쉽게 떠오르는’(available) 2009와 2015. ‘2009 신종플루’는 2015년 메르스로 소환되었고, 코로나는 다시 2015년을 소환했다. 소환된 2015는 2009를 품고 있었다. 코로나는 혼자 오지 않았다. 오 년 주기설을 떠올리게 할 간격으로, 점층법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온 감염병은 우리의 휴리스틱에 스위치를 넣었다. 코로나는 영리했다. 미디어와 SNS를 활용할 줄 알았고, CCTV와 GPS를 이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숙주인 우리는 재난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우리는 코로나에 대해서 적절한 무서움을 가지고 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무서움은 적절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맞다. 하지만 우리는 33배에 달하는 차이를 거꾸로 생각할 만큼 어긋난 판단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어떤 질병이 감염성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부터 뉴스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이 병을 다룬다. 오늘 하루 몇 명의 환자가 발생했다고 TV가 말한다. 자막으로 누적 사망자가 올라온다. 이 병에 감염된 사람이 어느 식당을 방문했다. 그 식당은 폐쇄되고, 대대적인 소독을 실시한다. 다시 31번 환자가 발생했다. 확진자의 동선을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300일을 넘게 반복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까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오랑시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우리는 지금 데라다 도라히코가 말한 ‘적절하게 무서워하기’라는 문제를 풀고 있는지 모른다. ‘감염병 코로나19가 발생했다. 이 상황에서 적절한 무서움이란 무엇인가를 서술형으로 쓰라.’ 이런 최고 난도의 문제에 잘 준비된 학생은 많지 않다. 그 전날 밤 우리는 주로 ‘뇌풀리쓰’로 감염병과 관련된 재난 영화를 보았고, 시험장에 오기 전에 또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았고, 기출문제로 쎈-메르스 문제집을 풀었고,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기에 도저히 스스로는 해결이 어려워 남의 문제를 슬쩍 훔쳐보았고, 서로가 서로를 베끼게 되고. 우리의 답은 이렇게 작성된 것은 아닐까?


 무서움의 정답이 뭐냐고? 수능 시험 후에 답을 발표하듯이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정답은 한 사회의 기억과, 사회적 담론과, 과학적인 소통과, 정치적인 지형과, 의료적 역량과, 거버넌스의 형성과, 심지어 타자에 대한 포용성까지 함께 참여하여 써나가는 집단 창작이다. 당장 그 무서움이 적절해진다고 어느 날 보건 당국의 마당에 백기가 걸리고, 선별 진료소는 철수하고, 마지막에 헬기가 등장하면서 재난이 끝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잘 썼다’ 할지라도 우리의 답안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서술형 답안지라면 그럴 필요가 있고, 종종 그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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