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건 네 할아버지 꺼야.”
엄마가 베 보자기를 대야 위에 덮으며 말했다. 나는 베 보자기와 대야에 담긴 수정과를 번갈아 보며 바보처럼 물었다.
“뭐가? 베 보자기가? 아니면 수정과가?”
엄마는 얘 좀 봐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흘기며 답했다.
“그야 베 보자기 말이야. 지금 만든 수정과가 어떻게 니 할아버지 꺼니? 우리는 제사도 안 지내는데.”
나는 그러게- 하고 짧게 대답한 뒤 대야 위에 살며시 얹어 놓은 베 보자기를 보았다. 이젠 세상에 없는 외할아버지의 것. 엄마도 얼굴을 모르는 외할아버지의 것. 그것은 하늘로 떠나 버린 당신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겨 준 흔적이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할머니가 할아버지 수의로 만든 보자기래.”
엄마는 그 흔적의 내력을 말하며 베 보자기를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냄비에 물을 채워 생강과 흑설탕을 넣고 끓였다. 나는 나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는 외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을 멍하니 보았다. 그 흔적이 대야 위에 슬몃 내려앉는 것을, 얼굴도 모르는 외할아버지가 내 가슴 위에도 슬몃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 보자기를 만들 때 우리 외할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작년 추석이었다. 우리 세 모녀가 아빠와 이별하고 처음으로 외할머니를 찾아뵌 날이었다. 작은 외삼촌 방에서 쭈글어진 고무풍선처럼 작아진 할머니는 웃으며 나를 반겨 주셨다. 할머니는 예전보다 많이 작아져 계셨다. 저렇게 작지 않으셨는데.
할머니는 나를 참 이뻐하셨고 나도 그런 할머니를 잘 따랐다.
어렸을 적 밭에서 할머니와 같이 당근, 감자, 고구마를 캐던 그 날과, 막 캔 당근을 씻어 어린 손녀에게 물리시던 할머니의 그 손이 생각났다. 달큰한 당근의 향이 입 안에 돌 때, 밤에 할머니와 같이 방에 누워있을 때, 어린 나는 우리 가족의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린 아빠와 이별해야 했다. 나는 셋이 되어 버린 우리 가족을 위해 공부했고, 엄마는 우리 두 자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려 그 여린 어깨로 아빠의 몫까지 이 세상의 짐을 짊어져야 했다.
우리에게 추석이란 없었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욕했다. 오랜만에 할머니의 구수한 욕을 들으니 좋았다. 할머니는 한동안 욕을 하시더니 서랍에 감춰둔 사탕과 양말 꾸러미를 꺼내셨다. 이모들이 할머니 드시라고 사드린 사탕과 춥지 않게 잘 신으시라고 드린 양말. 세월이 빗겨가지 못한 야윈 손은 힘줄과 주름이 한데 얽혀 있었다. 그 손으로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나의 손을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양말, 이 사탕 가지고 가라고.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이거 가지고 가서 동생이랑 엄마랑 나눠 먹고 나눠 신으라고.
나는 그 자리에서, 할머니의 늙은 손을 부여잡고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울었다. 아버지의 부재가 서러워서 울었고,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고약한 손녀라서 울었다. 한편으론 감사해서 울었고, 좋은 호강을 시켜드리지 못한 마음에 울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이른 죽음에도 여섯 자녀를 키워야했고, 어린 손녀들을 위해 마음을 쓰느라 편할 날이 없으셨다.
그 늙은 손에, 그 나이든 꽃 위에 나의 어린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 마법을 보여줄게.”
엄마가 곶감과 호두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와 동생은 엄마 앞에 앉아서 엄마가 어떤 요술을 부리는지 지켜보았다. 엄마는 곶감의 꼭지를 떼어 펼쳐 놓고는 씨를 발렸다. 그 위에 호두를 겹쳐 놓아 또로록 말고, 김밥처럼 썰어 냈다. 정말. 마법이었다.
“와. 호두꽃이다. 호두꽃이 폈다!”
동생이 신이 나서 말했다. 정말. 호두꽃이었다. 엄마의 여린 손에서 호두 꽃이 피어났다.
“그냥 곶감 하나를 수정과에 넣으면 먹기 힘들잖아. 이렇게 하면 보기도 이쁘고. 얼마나 좋아.”
“어디서 이런 걸 알았어?”
나는 신기해서 엄마에게 물었다.
“예전에 책에서 한 번 봤어.”
마법을 부린 엄마는 기분 좋게 웃으며 냄비속의 물을 대야에 부었다. 계피와 흑설탕을 끓인 물 위로 생강과 흑설탕을 끓인 물이 쏟아졌다. 수정과는, 엄마와 할머니가 남편 없이 견디던 시간처럼 어두웠고, 앞으로 견뎌야 할 예측할 수 없는 시간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그 시간에 호두 꽃이 피리라.
마술을 부리던 엄마의 가녀린 손, 그 꽃처럼,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수의를 잘라 보자기를 만들던 그 꽃처럼, 다시 우리의 시간 앞에 꽃이 피리라. 그리고 나도 어쩌면. 누군가를 위해 꽃이 되어 피리라. 꽃 위에 눈물을 쏟아 내던 내 손도 꽃이 되어 피리라.
수정과 향이 알싸하게 감돌았다. 우리는 다시 추석을 세었다. 친척들과 왁자지껄하게 보내지 않았어도, 제사를 지내며 보낼 순 없었어도 꽃 때문에 행복했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피어낸 꽃. 그리고 나도 피어낼 지 모르는 그 꽃. 지금도 이름 없는 누군가가 피우고 있을 꽃. 바로 그 꽃.
어둠속에서 빛나는.
작지만 밝은.
그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