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물꾸물한 소설책
여름날에 핀 곰팡이 심정 / 이부 / 선홍빛
약 3주간의 제주도 여행.
동네에 있는 "애월책방이다"라는 독립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제목이 가장 먼저 끌렸고 잠시 읽어 보았을 때 사고 싶고,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작년 여름이 지나고부터는 책을 읽고 나서 글을 쓰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단지 게을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책이 나에게 다시 기록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주었다.
단편 소설들의 모음이고 읽다 보면 다양한 영화가 떠오른다.
이웃집 토토로, 끝까지 간다, 레디 플레이어 원 등등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멜랑꼴리 한 감정은 이부라는 작가가 가진 매력인가 보다.
여름에 집필한 책답게 곰팡내 날 것 같은 분위기가 흠씬 느껴지는 책을
흐린 겨울 휴양지에서 읽는 것도 책의 매력을 느끼는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을 몰입하여 읽은 이야기들이다.
내가 기록을 다시 하고 싶어진 이유는,
"어 홀 뉴 월드"편의 일부분이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 홀 뉴 월드"는 타임머신이 개발이 되었으나
매년 7월 7일 랜덤 하게 한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게 되고,
그 여파(나비효과)로 인해 다음날이 되면 많은 기록물과
사람들의 기억이 바뀌어버린다는 설정으로 전개된다.
그로 인해 7월 1일 즈음부터
젊은 층 사이에서는 운명의 소개팅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유행하게 된다.
7월 7일이 지나서도 잊지 않으면 운명의 상대라는 유행이다.
이런 배경에서 여자 주인공이 7월 1일에 소개팅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중 7월 3일 내용의 일부분이 나를 자극한 부분이다.
*참고로 소개팅 상대인 정누림은 구두닦이로 돈을 벌고 있는 화가이다.
"왜 그림이 다 포장돼서 쌓여만 있어요? 꼭 창고처럼."
대화를 하자던 그에게서 바로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두컴컴해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방에 전시라도 하면 좋지 않나. 인테리어도 되고."
"내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나 많은데요?"
"내 것이지만, 분명 내 것이 아니에요. 나비 효과 때문에 진짜 내
그림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게 분명해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중에 마음이 움직이는 그림이 단 한 점도 없거든요."
그게 뭐람.
어제까지 알던 것, 어제까지 알던 사람을
내일이 되어 알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면
혼란스러울 것 같다.
하루라는 시간 간격을 조금 더 늘려보자.
10년의 간격으로 바꿔 생각해 보자.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어떤 것들은
잊히고 어떤 것들은 남게 된다.
그래도 소설과는 다르게 선택적으로 간직할 수 있고
기억 속에 남길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마치 랜덤 하게 변하는 느낌인데
나는 무엇을 믿고 어디에 의지해 나아갈 수 있을까?
내가 간직한 것들에 의지해서 나아가는 것은 안정적이게 보이지만,
변해버린 나의 생각과 세상을 실시간으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조금 더 쉽게 생각하기 위해
조각이라는 활동에 비유하여 제약 조건을 만들어 보았다.
내가 만약 조각가이고, 작품을 만드는데 12시간이 걸린다.
시작할 때 도면을 그릴 수 있고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도면은 단 한 장뿐이라 수정하면 이전 도면을 볼 수 없다.
이때 10분마다 내 생각이 리셋된다면
나는 어떤 전략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도면은 나의 내적인 모습이고
조각은 나의 외적인 모습이다.
어떨 때는 2시간 동안 도면만 수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떨 때는 4시간 동안 조각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생각이 유동적으로 변한다면
전략을 세우기보다는 그저 매 순간에
내 마음에 충실하여 진행하는게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그리고 완성이 되었을 때
누림의 말처럼
작품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걸로 성공한 것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