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기억은 여섯 살부터다. 여섯 살이 집에서부터 버스를 몇 정거장 타고 와 엄마의 직장까지 도착하는 미션을 받는다. 누군가 버스를 태워주면 엄마는 도착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 안의 아이를 받는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탈 것을 타고 잠들 수 없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과연 내가 올바로 정류장에 내릴 수 있는지를 몰랐으니까.
두 번째 기억은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엄마 미용실에서 일하던 언니를 따라 언니의 고향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지금도 6살 아이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 있을까 의문이다. 나는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가려고 버스를 혼자 내렸고 돌아갈 땐 어떤 버스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화장실로 돌아가 모든 문을 열었다. 아마 언니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아직도 생각난다. 큰 볼일을 보던 아저씨의 당황스러운 표정. 이젠 웃을 수 있지만 언제까지 그 사건을 떠올리면 소름과 함께 공포가 밀려왔다.
세 번째는 여덟 살쯤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족들 카드를 보냈다. 우편물을 동시에 보냈겠지만 도착이 동시에 되지 않았나 보다. 모든 가족이 아버지의 카드와 편지를 받았으나 내 것만 빠져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어린 생각에는 그럴 수도 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나의 카드가 도착하기 전까지 혹시 내 것이 없을 수도 있을까 생각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동안, 어느 누구도 설명의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내 것이 영영 빠져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혹시 내 것만 보내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에서 미움과 서운함이 얼굴을 내밀었다. 며칠 후에 카드는 도착했지만 잠시동안 혼자서 힘든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
신체 발달이 빨랐던 나는 초등 고학년에 사춘기를 겪었다. 초등고학년을 지나면서 또래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었다. 그때부터 누군가와 잘 지내는 것이 어려웠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를 찾고 싶었다.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학업면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은 많았으나 결과는 그에 못 미쳤다. 나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목표만 높게 잡아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때부터 내 모습이 나의 마음에 차지 않고 심하게 짜증이 늘어났다.
부모님에게 나는 평범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하라는 대로 잘하는 착한 언니가 되어야 했다. 반면 동생은 표정이 밝고 붙임성, 사교성이 좋았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별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른 이들에겐 그 애가 '특별한' 존재임을 강조하곤 했다. 자식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많이 갈망했나 보다. 나보다 공부를 못했기에 아버지는 동생의 진로를 많이 고민했다. 그리고 동생이 밥벌이를 하도록 계획을 세워 줬다. 충분치 못한 가정 형편에 두 자식 모두 넉넉하게 지원해 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안다. 하지만 영문과 졸업한 나보다 동생에게 유학비용을 지원해 주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입장은 또 다를 텐데 그걸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자식의 입장에서 나의 요구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모습이 철없음을 안다. 하지만 설명을 조금이라도 해 주었으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