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버튼 누르지 말지

나랑 산 지가 20년 되었는데도 모르냐

by Min kyung

카톡이 왔다. 운동화 사진만 주르륵 보인다.

"이게 뭐야?'

"직원들이 구매했다는데 괜찮다네."


아마도 신발 생산 공장이 많은 이 지역, 어딘가에서 정품신발이 뒷구녕으로 빠지는 걸 의미하는 모양이다. 가격이 착하니 하나 사서 신어보자고 하는 게 남편의 주장이다. 그중에서 괜찮은 신발을 선택해서 주고 하루가 지났다.


남편이 다시 보내온 사진은 내가 선택한 신발과 디자인, 색상이 다르다. 자기가 이걸로 주문했단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남편 왈, 재고가 없다고 해서 자기가 골라서 주문했다는 것이다.


남편아, 나의 남편아.. 나랑 20년 사신 님이 맞으신가요?





내가 까다롭다는 말이 아니다. 최종 결정전에 일언반구 언질을 주셨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신발 한 짝 아무것도 아니다. 동네슈퍼에서 과자 하나 맘대로 고른 것과 비슷하다.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냐. 하지만 내가 이렇게도 질색팔색을 하는 데는 나의 성장과정에 어마무시하게 짓누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했다. 애정도 많이 보여주셨고, 나름 공을 많이 들이셨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랑의 종류와는 완전히 핀트가 달랐다. 어떤 이는 이를 듣고 복이 많아서 실없는 소리 하네, 그럼 부모가 못 해 줘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 자유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선택지들을 강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 말대로 해, 이게 다 너를 위개 해서 하는 일이야.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지. 부모자식 간의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예시가 나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나이 40이 넘어서까지 어깨까지 머리를 기를 수가 없었다. 어릴 때는 미용사인 어머니가 관리가 안 된 다면서 머리를 항상 쇼트커트로 잘라버렸다. 80년대 초등학생 나는 항상 긴 머리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시달렸지만, 개뿔 미용사 자녀라 세련이다는 주변의 말에 어머니는 또 가위를 들었다. 착한 아이 컴플럭스, K - 장녀인 나는 그냥 그것이 옳은 것인 줄만 알았다.


내 말은 수용의 대상이 아니었고, 나는 내가 왜 답답해하는지도 몰랐다. 가슴이 항상 답답했다.

학창 시절 내내 거의 신체화증상(마음의 고통이 신체로 나타나는 증상)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가 나에게 물어보셨다. "너는 왜 머리가 안 아프면, 배가 아프고, 배가 안 아프면, 머리가 아프냐?" 왜 매일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사느냐고, 아프다고 하는 아이에게 지겹다는 듯이 물어오셨다.


내가 느끼는 미세한 감정들은 나의 가족들이 다 받아 줄 수가 없었나 보다. 사춘기를 일찍 겪은 나는 표정이 항상 어둡고, 내면의 주요 질문은 '나는 왜 이럴까?'였다. 왜냐하면 가족들은 나에게 이 물음을 가장 많이 물어봤다. 넌 왜 그럐? 넌 왜 자꾸 짜증 내? 넌 왜 표정이 어두워? 무슨 문제 때문에 그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청소년은 다 답할 수가 없었다. 이 질문들은 이해하려고 던지는 질문들이 아니었다. 제발 짜증 좀 내지 마. 제발 얼굴 표정 좀 밝게 해 봐. 제발 입 닥치고 할 일이나 잘해. 이런 의미였다.


내가 무슨 말이나 하려면 엄마는 나에게 많이 배워 유세하냐며 나의 입을 막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엄마는 자존감도 바닥이고, 인생을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 생각 안 하고 산다. 그래서 치매가 왔나, 치매가 오기 전에도 멘붕이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아주 더한 비난의 화살이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입을 닫는 편이 나았다. 그들은 나를 위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들과 최소한으로 마주치면 된다. 집엔 잠만 자러들어가면 된다. 어차피 방은 두 개에 하나는 아버지, 하나는 엄마, 나, 동생, 세 명이서 썼으니까. 예민한 시기를 아주 암울하게 보냈다.


그러나 교육은 잘 시켜주셨고, 학대하지도 않았다. 공부도 잘하라고 질책도 해 주셨고, 당연히 나올 수 없는 결과에 실망도 많이 하셨다. 대학도 마칠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재산 팔아서 동생을 영국 유학 3년 보내시고, 형편이 안 돼서 나는 장학금도 가끔 받고 여차저차해서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다.


어린 마음이라 대학 졸업까지 지원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했는데, 동생만 유학 보내주시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어릴 때는 그 사실이 이해가 안 갔고, 그 담엔 그 사실이라도 나에게 설명조차 하지 않은 것에 서운해했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최대한 빨리 탈출하는 것이었고, 목표를 이룬 다음엔 그 사실조차도 희미해졌다. 어쨌든 나의 기억 속에 그들은 가족도 아니었다고 강하게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더라.



어린 나의 눈에 우리 집 소비패턴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가 있었다. 내가 예비 중1이었을 때, 내가 하도 공부방법을 모르겠다 하니 아버지는 교대생 언니를 과외선생님을 붙여주셨다. 하루는 그 언니를 저녁 식사에 조대하게 되었는데, 나는 너무나 창피했다. 아버지는 식탁 위에 음식들이 아주 특별히 맛있다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셨고, 나는 계속 아버지 눈치를 봤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음식들과 우리 집 천장에 핀 곰팡이는 너무 균형이 깨지는 조합이었다. 어린 나이에 나는 아버지의 허세 들어간 태도를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이런 걸 좋아한다. 실속은 어쨌든지 겉모양만 있어 보이고 세련돼 보여야 하는 것, 그런 것들.




속 빈 강정 같은 가족에서 탈출하고 속만 가득 찬 남편을 골라 결혼했다. 나는 겉모양은 좀 촌스럽더라도 단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속이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나의 생각은 항상, 실제로 있는 것, 진짜로 가진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가족은 겉모양이 촌스러우면 왜 그렇게 촌스럽냐는 핀잔을 많이 줬다. 와, 촌스러운 게 뭐 어떤데. 실속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지.



실속은 만족했으나 가끔 이 남편은 자기 통제 성향이 너무 강하다. 자기가 결정한 일에는 그 이유가 있겠지라는 이해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 그 결정이 맞다면 얼마든지 따르리이다. 그래서 20년을 입 닫고 따라서 살았다. 중대한 결정에서 실수한 적도 있어서 본인도 조심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통제는 좀 너무한 것이 아니냐.


남편아, 그 버튼은 나의 가장 근원의 아픔을 건드리는 버튼이었다. 그걸 누르고 마느냐. 나는 누구의 선의도 호의도 이거 하면 좋잖아, 그냥 해, 이게 더 나아.라는 강요의 제안은 노노다. 너나 많이 해. 니 거 결정할 때 그렇게 해. 나의 동생의 언어는 항상 그래서 최근까지도 마찰이 많았다. 내가 결정해서 촌스럽든, 더 낫지 않든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더 낫다는 건 네 생각이고. 난 다른 생각이라고.



오늘 아침에 남편이 눌러버린 버튼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나의 검은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너무 타임머신을 타고 말았다. 이 모든 스토리를 풀자면 책 한 권 나온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검은 이야기로 책을 쓸 의향이 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이 이야기는 내가 경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사실 넌 왜 그래? 이 한 문장의 물음이 지금도 책 보고 공부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되려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몇 십 년 살아보니 결국은 내 생각이 옳고, 행복한 방향으로 인생을 사는 것임을 매일 느낀다.


나는 행복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 주는 남편(통제가 강하지만 실속도 있고, 착하다), 나를 엄마라고 따르는 아이들도 있다. 그들에게서 사랑받는다. 원가족에게서 열망했던 사랑, 지금 가족에게 충만하게 받고 있다. 실속 있는 남편 덕에 실속도 있다. 나의 노후는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잘 살고 있다. 그걸 증명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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