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련의 여주인공인줄 알았다.

20대) 27살.

by 라미

"이렇게 평생 할 자신 있어? 꾸준히 못 할 거면 안 하는 게 나아."


나도 K도 상대방에게 뭔갈 요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행에서 돌아오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주말에

K는 양쪽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길 원했다.


"다른 집은 다 이 정도해! 내가 먼저 할 테니까 봐봐."


내 부모님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고

굳이 아빠도 바꿔 달라고 말하며

연신 '아 예예! 아닙니다!' 같은 무슨 구호도 아닌 것이 똑같은 말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원한 적 없고. 한 번 시작하면 나중엔 하루라도 거르면 불효자식 같이 되는 거야."


그럼에도 K의 뜻은 완강했다.

K가 아들로서 체면치레를 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 역시 오래 사회생활 한 사람은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 역시 시부모님과 간단한 통화를 마치고 주말 아침은 큰 이벤트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집들이? 그래. 한 번은 오셔야지."


결혼식을 올리고 남들 다 알게 신행을 다녀온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다가 부모님을 초대해서 집들이를 하잔 K의 말에 나는 큰 적대 감 없이 수긍했다.

그 정도는 장성한 자식을 결혼식장에 무사히 들여보내 준 부모님에 대한 성의라 생각했다.


일주일 정도 남겨두고 나와 K는 집들이 때 보일 음식만 주야장천 만들고 먹어댔다.

'결혼하면 다 할거 내가 왜?'라며 엄마가 조금이라도 봐두라고 할 때 옆에 서 있기조차 싫다며 거실 소파에 누워버린 지난날 내가 아찔했지만 이미 지나갔으니...

이렇게 매일 같은 음식을 먹으며 집들이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늦으시나?"

"전화 한 번 해봐."

"이거 불 텐데.."

"빨리 다시 만들게."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너 지금 이 상황 우리 부모님한테 또 전화로 말해봐."


집들이 당일.

도착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식구들이 오지 않았다

메뉴 중에 잡채는 마치 컵*들 같이 투명하고 약간 통통해지고 맛없어 보였고

오징어 볶음은 윤기를 잃어 불에 타버린 것처럼 보였다.


"나 안 해. 할 만큼 했어."

"멀리서 오시니까 좀 더 기다려보자."

"계속 다 와간다, 다 와간다만 하시는데 지금 1시간도 더 넘었어."

"오늘 하룬데 이해 좀 하면 안 돼?"


마침내 터지고야 말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면 정확한 이유라도 말을 해줘야지! 왜 늦는지, 앞으로 언제 도착할 예정인지

밥은 먹고 가니까 커피나 한 잔 하자든지!


"아유 애들이 멀리 간다고 어찌나 짜증을 내던지 휴게소에서 간식 좀 먹고 하다 보니 늦었네."


근 2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해선 조카들의 투정으로 늦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해파리 냉채했어? 어려울 텐데!"

"그거 잡채예요."

"아이고~~ 꼭 해파리냉채 같다!"

"..."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으레 이런 자리에선 며느리가 높은 톤의 목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주도했던 거 같은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설거지를 이따 해주겠다는 K의 말에도 굳이 가족들 다 있는 자리에서 설거지를 마쳤다


"야. 우리 부모님은 뭐 사회생활 안 하시냐? 너 그렇게 입 꾹 다물고 뭐 같은 얼굴하고 있으면 모르시겠냐?"

"오늘 온 사람이 몇 인 줄 알아? 운전대 잡은 사람, 애들 다 빼고라도 나한테 전화로 늦을 거고 우리 밥 먹었으니 먹을 거 차릴 필요 없다고 말할 사람 몇 명이었는지 세봤어?"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고 잡아먹을 듯 한 눈으로 쏘아보기만 했다.

더 큰 싸움은 이미 해봐서 서로 거기까진 가지 말자는 무언의 제안 같은 거였다.


"이거는 나를 이렇게 해도 된다고 무시한 거야. 약속 좀 늦어도 되고, 네가 준비한 게 뭐든 상관없다고 날 무시한 거라고."


결국 내가 한마디 먼저 내뱉었다.

그리고 핸드폰, 지갑, 겉 옷을 챙기고 일어났다.

결혼 전 그때처럼 아무것도 보고 싶지가 않아서

눈을 감고 싶었다.


"너 지금 나가면 이혼이야. 나는 뭐 화 안 나서 한마디 더 안 보태는 줄 알아?"


이혼? 결혼하고 1년도 안 됐다.

그런데 이혼을 이렇게 쉽게 내뱉을 거면 그래 차라리 이게 맞는 게 아닐까?

서로의 민낯을 우린 다 못 보고 결혼을 했나?

가만히 K를 보다가 그대로 집을 나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탁'


신경질적으로 현관문 걸쇠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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