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 마스터의 추천 안주

3] 삶이 고될 땐 백반에 소주

by 라미

그런 날이 있다. 입에서 '일 하는 중'이 아니라 '일을 쳐내는 중'이라고 나오는 날.

오늘날 잡았나? 싶은 날.


열받고 길길이 날뛸 틈도 없이 일을 하나씩 쳐내며 사태를 안정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정말 뱃속이 텅 빈 것 같은 허기가 느껴진다.

배고픈 느낌은, '아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나?'라는 단순한 생각이 들 때고

허기진 느낌은, '아....' 생각도 하기 싫고 내 손이 바쁘게 먹을만한 뭔가를 찾을 때로 난 구분 짓는다.


집에는 김, 당근, 콩나물, 참치캔 그리고 어묵과 달걀이 꼭 있다.

이런 날은 급하다고 라면 따위로 내 허기짐을 달래고 싶지도 않아서 비장하게 부엌에 서 본다.


1> 참치 기름을 손이 바들바들 떨릴 때까지 꾹 짜서 채칼로 썰어 낸 당근과 섞어 참치 전을 하나 하고

2> 코인육수를 하나 넣고, 요리에*스를 한 숟갈 푼 다음에 모자란 간은 소금 약간과 가쓰오부시 장국을 좀 넣어서 계란국도 만들고

3> 미리 무쳐놓은 콩나물을 다 털고 김가루를 뿌린 다음에 초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빔밥도 하나 만든다.

4> 어묵까지 쓸까 하다가 내 인내심이 받쳐주지 않아 참치 전을 찍어먹을 초간장만 후딱 만들어서 자리에 앉아야 한다.


밥 한 숟갈 먼저 그다음엔 국물을 먹고 소주 한 잔으로 입을 개운하게 만든 다음에 담백하고 살짝 기름진 참치 전을 먹으면 나도 모르게 '음!!'하고 씩씩한 탄성이 나온다.

그제야 비로소 리모컨을 들어서 TV를 틀 여유도 생긴다.


초장이 새콤 달달한 탓도 있겠지만 밥하고 소주를 같이 먹으면 진짜 입 안이 온통 단 것 같다!

초콜릿의 단 맛은 대놓고 단 데다가 약간 이가 시린 것 같은 기분도 드는데

밥과 소주를 같이 먹으면 은은한 단 맛에 한 세 잔 까지는 연거푸 들이키게 되는 것 같다.


빨리 마신 탓에 머리가 간질간질 해지면서 취기가 오르면 국물을 좀 더 마셔보는데 오히려 얼굴이 뜨뜻미지근해지면서 이때부턴 혼술이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마셔야 한다.


내가 혼술을 하는 이유는 내 불편하고 힘든 기억을 지우고 싶어서다.

다시 곱씹어서 뭐가 문젠지 분석을 한다거나

나의 실수는 없었나 자아성찰을 한다거나 하는

성숙한 인간이 아직 못돼서.


즐겁게 혼술 하면서 지우고 싶은 기억을 지우고

대신 내일 아침엔 더 기분 좋게 웃는 걸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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