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27살._3
"그래 뭐 좋은 소식은 없고?"
"저 생리통 때문에 진통제 먹는데.. 무슨~ 없어요 어머니."
나의 결혼생활이 그래도 평화로웠던 이유는
K의 완벽에 가까운 중재자 역할과 분리된 경제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사위는 아들이 아니다. 사위다.'라고 친정에서 슬그머니 요구하는 사위역할에 대해서
부담에'ㅂ'도 주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나와 K의 헌신과 노력이 나름 평등하게 존재했는데
임신의 영역에선 이 평등함이 균형이 맞지 않았다.
"아직 A가 젊고 나도 회사일이 바빠서 내년쯤 생각해요."
시부모님은 감정기복이 거의 없으시고 대체로 무던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살짝 물어보는 임신소식이 절대 압박이 아님을 나도 알았지만
막말로 시술을 감행하면서 '나는 절대 안 낳겠다!'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딩크를 합의한 게 아니라면
길게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K는 내가 애를 안 낳겠다고 하면 어쩔 거야?"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양가 부모님이 다 멀리 살잖아.. 애를 낳으면 나는 한동안 돈도 못 벌고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집안일이고 여가고 다 올 스톱이야."
"애가 늘 그렇게 손이 필요한 상태는 아닐걸. 크면서 조금씩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자기주장을 펼치는데 주저함이 없는 K도 아이 문제만큼은 조심스러운 태도였기 때문에
정말 임신만큼은 나의 몫인 거 같았다.
나의 선택과 결정으로 임신을 마음먹고
내 결정으로 임신을 하겠다 했으니 열 달을 온전히 버텨내는 것 또한 도로 물릴 수 없이 해내야 했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나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 거냐고 누가 압박이라도 하는 건지
아님 너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걸 다른 사람들은 성숙하게 결정하고 해 낸다고 날 놀리는 건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임신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K네는 언제 애 가질 거야?"
"뭐.. 우리도 조만간 가져야지 않을까?"
K와 결혼시기가 비슷한 다른 친구가 임신 소식을 전해오며 한 잔 하자기에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나와 성향이 잘 맞는다 생각해 따로 얼굴도 몇 번 봤던 이 친구의 와이프는 나 못지않은 말 술인데
임신으로 인해 사이다만 홀짝이는 모습이
낯설고 어쩐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언니는 안 떨려요? 좀 있으면 언니 막 배부르고 그러겠다."
"나도 실감이 안 났는데 막상 오늘 확인하고 오니까 뭔가 결정된 거 같아. '아 내 뱃속에 애가 있구나.' 그래서 또 덤덤하네?"
술을 당분간 못 먹는다는 사실에 아쉬움도 없고
마냥 놀랍고 기쁘지도 않고
늘 내가 봐왔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언니를 봐서 조금 안도감이 들었던 거 같기도 했다.
"이제 너 술친구 사라졌네."
"그러게 언니랑 술 마실 때 재밌었는데"
"근데 있잖아..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어서 애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보다."
"?"
"지금이 우리 둘 다 훨씬 젊고, 특히 너는 젊은 데다 애도 있으면 나중에 직장에 돌아갈 확률이 어떻게 보면 더 높지 않을까? 적어도 애 낳는다고 길게 자리 비울 일이 나중엔 남들보다 없을 테니까."
갈팡질팡 하던 마음의 추가 살짝 기우는 것 같았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데
나중엔 내가 애 낳는다고 자리를 오래 비울 일은 없겠지만, 그 애는 혼자 크는 게 아니라 아프거나 어린이집 행사가 있거나
또는 학원이라도 다니거나 하면.
짧게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는 건 대체로 내 몫일 거야
"나는 네가 당장 몇 년을 내다보면서 걱정하는 게, 나중일의 전부라고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그 당장 몇 년이 잠깐의 1,2년이 아니야."
"그러면 진짜 심플하게 딱 이것만 생각하자."
"뭐?"
"내 정년만 생각하는 거지. 일찍 애가 존재하면 내가 그 애 인생에서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줄 기간이 늘어날 거야."
좀... 속물 같고 한심한 것 같기도 하고
정작 중요한 뭔가를 놓치는 것 같기도 한데
참 그 어떤 말보다 설득이 되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