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의 애절함 더듬으며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으로

충청도의 산 26

by 장순영

초가을 엷은 햇살이 이 산, 나무들에 의해

정교하게 조각된다. 아직 물들지 않은 수림에서,

바위벽 비틀린 틈으로 가을빛은 조각되고

또 잘게 부서져 은색 물결을 이룬다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아있어 이름 붙여진 천등산天登山은 전라남도 고흥, 전라북도 완주, 경상북도 안동에도 있는데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과 제천시 백운면에 걸쳐있는 천등산과 인등산, 지등산의 이른바 삼등산을 가기로 하였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 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이 지역에는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로 더욱 유명한 박달재(해발 453m)가 있다. 충청북도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이다. 또 지등산과 인등산도 인근에 함께 있어 천天, 지地, 인人의 3 태극이 모두 갖추어진 곳이다. 이들 삼등산은 천동, 지동, 인동이라는 세 신동이 등장하는 설화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를 침범한 거란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였는데 1216년 김취려 장군이 박달재의 지형·지세를 십분 활용하여 격퇴하면서 국가 전란을 수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전적지를 기리기 위하여 김취려 장군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또 1268년에는 고려의 이 고장 별초군도 몽고 군사를 막아냈다. 이처럼 전적지로서의 자취 외에도 박달재는 노랫말처럼 영남 땅의 박달 도령과 이 고개의 아랫마을 처녀 금봉 낭자의 애절한 사랑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으면서 충주로 이어지는 박달재는 터널로 인해 도로로서의 이용가치는 떨어졌지만 박달재 옛길이라는 관광 상품으로 유지, 관리되고 있다.

조선 중엽까지 이등령으로 불리던 박달재는 아득한 옛날 우리 민족의 시원과 함께 하늘에 천제天祭를 올리던 성스러운 곳이다. 천등산이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래로 유명세를 타고 있으나 실제 박달재가 있는 산은 시랑산(해발 691m)이다. 천등산은 박달재에서 약 8㎞ 떨어진 다릿재와 연결되어 있어 그곳을 들머리로 잡는다.

박달재,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청동상.jpg 박달재에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청동상이 세워져있다


천하명당은 이산 어디에 있는고


박달재를 거쳐 인근 충주시 산척면 광동마을 회관 앞에 산악회 버스가 멈추자 후덕한 품새의 천등산이 바로 외지 손님들을 반겨준다. 산악대장의 안내를 듣고 마을 도로를 따라 사기막이라고 표시된 방향으로 걸어 올라간다.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고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를 지나와서 그런가 보다. 저도 모르게 울고 넘는 박달재가 흥얼거려진다. 조선 중엽 경상도에 사는 박달 도령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박달재 인근 마을에 사는 금봉 낭자를 만나 서로 반해 백년가약을 언약하고 한양으로 향한다.


“가시면서 드세요.”


금봉 낭자는 도토리묵을 쑤어 박달 도령의 허리춤에 달아주며 먼 길에 요기하게끔 하고 그 직후 매일 촛불을 켜놓고 장원급제를 빌고 또 빌었다.


“글씨는 사라지고 그녀가 들어앉았구나.”


과거시험을 위해 책을 펼쳐도 박달 도령의 눈에는 금봉이의 모습만 아른거리더니 결국 낙방하고 말았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면목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금봉 낭자를 찾아갔으나 기다리다 지친 금봉 낭자는 사흘 전에 죽고 말았다. 떠난 사람보다 남아있는 이가 더욱 애절한 마음을 지니는 게 이별일까. 슬픔에 젖어 식음을 전폐하던 박달 도령은 박달재를 오르는 금봉이의 환상을 좇아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사랑을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이라고 말하기도 있지만 그건 무책임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국내 버전을 떠올리면서 천등산 금식기도원을 지난다.

63. 임도를 지나기 전의 소나무 숲이 푸른 그늘을 만들어준다.jpg 임도를 지나기 전의 소나무 숲이 푸른 그늘을 만들어준다


소나무 숲을 통과하여 임도를 따라 천등산 등산 안내도가 있는 다릿재에 이르고 여기서 좁은 산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부터 급경사다. 천등 지맥 합류점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정상까지 1.2km를 남겨둔 지점이다.

말 그대로 작은 봉우리인 소봉(해발 614m)에 이르러 숨을 고르고는 잠깐 내려섰다가 연이어 계단을 가파르게 올리면서 안부에 닿는다. 너덜 바위지대를 지나 돌탑이 보이자 환하게 전망이 트이고 산 아래로 백운면 일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 천등산 정상(해발 807m)에 다다랐다. 충북 충주시 산척면과 제천시 백운면에 겹쳐있다.

주변에 높은 산들이 없어 사방이 확 트였고 남쪽으로 인등산과 지등산이, 그 뒤로 계명산이 솟아있다. 서쪽으로는 박달재 방향으로 구불구불 길이 이어지고 그 뒤로 백운산과 구학산이 아스라이 시야에 잡히며 남동쪽으로는 청풍호가 내려다보인다.

전망이 우수한 천등산 정상은 매년 충주시에서 개최하는 세계무술축제 등 큰 행사 때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척의 지등산과 인등산을 짚어본다. 이곳 천등산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인등산과 지등산이 있어 이 세 산의 자락에는 천하제일의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 세조 때 명당을 찾아 팔도를 유람하던 황규라는 지사가 천등산에 왔다가 꿈에서 계시를 받아 세 군데의 명당 혈을 파악했으나 세상에 알리기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이곳의 명당자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니 답답하고도 맥이 빠지는 전설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많은 풍수가가 그 자리를 찾고자 수차 산을 헤매었을 것이다.

고향처럼 아늑하고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면 거기가 명당 아니겠는가. 우거진 수풀 틈틈새새 햇살 비추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뻐꾸기 울음소리 들리며 가다 걸음 멈춰 돌아보니 기골장대한 바위 봉우리에 소나무 뿌리내린 산정이 명당이고 명소 아니겠는가 말이다.

정상 가까이에 2층으로 만들어진 팔각정 아래층은 목재 마루를 깔았고, 2층은 창문까지 달아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에 대비할 수 있게끔 해놓았다. 초가을 엷은 햇살이 이 산, 나무들에 의해 정교하게 조각된다. 아직 물들지 않은 수림에서, 바위벽 비틀린 틈으로 가을빛은 조각되고 또 잘게 부서져 은색 물결을 이룬다.

팔각정에서 잠시 가을 햇살에 도취했다가 일어서서 산정을 떠난다. 완만하던 내리막길은 소나무 늘어선 능선을 지나면서 호흡이 편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경사가 급하게 낮아진다. 느릅재로 내려서는 길이다. 헬기장 조망 바위에서 막 내려선 천등산 정상을 올려다보고 충주와 제천, 원주 방면으로 첩첩 이어진 산자락을 바라보다가 벌목 지대를 지나 임도로 내려선다.

64. 수림 사이로 막 내려선 천등산 정상을 올려다본다.jpg 수림 사이로 막 내려선 천등산 정상을 올려다본다


둔대 삼거리 방향의 임도 주변에 곧게 뻗은 낙엽송들이 점차 여름 색깔을 잃어가는 중이다. 걷다 보니 평택과 제천을 잇는 고속도로가 발아래로 지나간다.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와 명서리를 연결하는 고개인 느릅재는 이 일대에 느릅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여기서 천등 지맥을 통해 인등산으로 들어섰다. 아래로 중원 컨트리클럽이 있고 SK 임도를 접하게 된다. 인등산 정상까지 2.4km의 거리 표시가 되어있고 SK증권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마음과 몸과 기의 조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심기신 수련장이 조성되어 있고, 자작나무 숲에 꾸민 야외 강연장에서 SK 루트라는 길을 끼고 오른다. 그리고 주 능선을 따라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와 동량면 조동리 경계에 있는 인등산 정상(해발 666m)에 닿았다. 정상에 함께 도착한 대여섯 명이 정상석과 함께 인증사진을 찍고는 곧바로 지맥을 따라 장선 고개 방면으로 향한다. 그다지 볼만한 광경이 있지 않은 인등산이다.

임도로 내려와 지등산 능선에 이르면서 아득히 충주호가 시야에 들어온다. 인등산과 지등산이 나뉘는 장선 고개에 이르러 다시 한번 지도를 들여다본다. 아스팔트를 따라 장선마을까지 약 1km쯤을 이동하고 거기서 성불암을 거쳐 지등산 순환 임도로 가게끔 표시되어 있다. 그렇게 성불암 간판이 설치된 진입로로 들어선다.

성불암 진입로와 지등산 순환 임도가 만나는 삼거리에서 잔선 마을과 두알봉을 바라보고 내처 순탄한 능선을 타고 지등산 정상(해발 535m)까지 오른다.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에 위치한 지등산은 삼등산 중 맨 남쪽에 위치하여 천지인 삼재三才의 끄트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충주댐에서 하류 쪽으로 바라볼 때 남한강 변을 굽어보면서 솟아있으며 산 아래로 충주호와 충주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계명산과 충주 동량면 일대를 내려다보고 고도를 낮추면 남한강 물이 눈에 들어오고 조동 근린공원에 도착하면서 세 산의 산행을 모두 마치게 된다.

버스에 올라 속속 도착하는 일행들을 기다리는데 산행의 묘미보다는 박달 도령의 우유부단함이 떠오르면서 살짝 스트레스를 받고 만다. 극복해내지 못하고 회피함으로써 도토리묵까지 쑤어준 금봉이를 죽게 한 죄가 쉽사리 용서되지 않는다.


“그렇게 무책임할 거면 건드리지나 말 것이지.”



때 / 늦여름

곳 / 산척면 광동리 - 다릿재 - 소봉 - 천등산 – 임도 – 느릅재 – 인등산 – 장선 고개 – 성불사- 지등산 – 조동 근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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