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 물결의 유혹,
민둥산에서 지억산으로

강원도의 산 17

by 장순영

임도를 지나 능선에 오르니 정상까지 길고

완만하게 이어진 길이 억새 방문객들로 가득하다.

정상 지대에 이르자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에 놀라고

사이사이 길마다 빼곡한 사람들에 또 한 번 놀란다.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은 억새 군락지로 유명한 산이다. 하늬바람에 일렁이는 은백색 억새 물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S 산악회 일정에 맞췄다. 가끔 동참하는 S 산악회 산행 버스엔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없지 않았는데 오늘은 하나같이 낯선 이들뿐이다.


“오늘처럼 청명한 가을에 떠나는 억새 산행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멋진 로맨스 아니겠는가.”


유난히 쌍쌍 동반한 산객들이 많은데 전혀 부부처럼 보이지 않는 커플들도 눈에 띈다. 서당 개 삼 년을 훨씬 넘어 풍월을 읊는지라 한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이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쉽사리 알아차리게 된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 했던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뒷자리에 혼자 앉아 눈을 감는다. 부부든 아니든 남녀 간의 에로스를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부처되기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거란 말에 공감한 적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욕구에 연연하는 부처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함께 산행하는 커플은 왠지 불륜으로 폄하시키고 싶지 않아 진다. 산은 부처만큼 위대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인자요산仁者樂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산에 오는 이들은 대개 어질고 선하다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다. 굳이 그 관념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부족한 잠을 청하려 눈은 감았지만 뒤숭숭한 잡념에 매달리다가 도착지에 닿았다.



눈물에 벌목당한 민둥산의 참억새


민둥산은 이름 그대로 나무가 거의 없고, 산세도 그다지 수려하지 않지만 억새 철인 가을에는 주특기를 살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비상한 재주를 지닌 산이라 하겠다.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불을 질러 나무를 없애고 억새 초원을 형성한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는 확연히 다른 설화 하나가 전해진다.

옛날 이곳 마을 주민들은 며칠째 밤낮으로 땅을 울리는 심한 진동을 느끼게 된다. 말 한 마리가 보름간이나 자신의 주인을 찾아온 산을 돌아다니는 말발굽 소리였는데 이후로 민둥산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고 참억새가 무성하게 자랐다는 것이다.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말이 제 주인을 찾으려 온산의 나무를 꺾고 뿌리까지 도려냈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은 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경희 시인은 민둥산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시를 지은 바 있다.


나무가 없는 민둥산에는

운해를 떠받들고 있는

넓게 펼쳐진 참억새

하늘에서 내려온 말 한 마리

주인을 잃고 헤매며

다가닥 거리는 말 발자국 소리

억새의 흔들리는 몸에 실려

비명이 되었으니

눈물에 벌목당한 민둥산에는

기다림의 화석으로

넋이 된

속으로 울고 있는 참억새뿐


증산초등학교를 들머리로 시작해 다소 가파른 낙엽송 지대를 지나 해발 800m 고지에 자리한 발구덕 마을에 이른다. 발구덕이란 둥글게 움푹 꺼져 들어간 곳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여덟 개의 구덩이가 있다 하여 팔구뎅이 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석회암 내 탄산칼슘이 빗물에 녹아 내려앉으면서 구덩이가 팬 현상으로 학술상 돌리네doline라 칭하기도 한다.

카르스트 지형 발달과정 중에 지표에서 초기에 나타나는 가장 작은 규모의 와지窪地 혹은 싱크홀sinkhol이 그것이다. 발구덕에는 화전민의 후손들이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몸 눕히고 살면 거기가 집이고 그 땅이 삶터였던 시절에 산은 그저 먹을 것을 얻기 위한 화전민, 심마니 혹은 사냥꾼들의 생계 장소였었다. 물 또한 물질 잘하는 해녀와 물길에 능숙한 어부들의 터전에 불과했을 것이었다.

그런 세월이 오래도록 최근까지 지속하여 왔기에 그나마 문명의 이기가 덜 침투했을 것이다. 그나마 개발의 범주가 더 넓어지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민둥산-억새군락지.jpg 빽빽하고 조밀한 억새 무리가 민둥산이 전성기임을 표현한다


이곳을 지나 오르면서 과연 억새 명품지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민둥산의 억새는 충남 홍성의 오서산, 경기도 포천 명성산, 전남 장흥 천관산 그리고 영남알프스라 일컫는 신불산, 재약산 사자평의 억새군락과 함께 전국 5대 억새 군락지로 꼽기도 한다. 민둥산 억새는 색이 짙고 빽빽할 정도로 조밀하며 키까지 큰지라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임도를 지나 능선에 오르니 정상까지 길고 완만하게 이어진 길이 억새 방문객들로 가득하다. 정상 지대에 이르자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에 놀라고 사이사이 길마다 빼곡한 사람들에 또 한 번 놀란다. 신불평원이나 사자평전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아마도 거기 영남알프스와 비교하면 아담하고 나무가 없어서 그럴 게다. 명성산 억새가 은빛으로 나부끼는 반면 민둥산 억새는 금색에 가깝다. 햇볕에 그을려 튼실해 보인다. 억새 무리는 바람 부는 대로 바람 따라 흔들리고 사람들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부대끼는 대로 향연을 펼치는 중이다. 아무리 흔들려도 꺾어지지 않는 휨의 유연함을 보노라면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민둥산 풍광.jpg 민둥산에서의 풍광


바람이 불어도 날려하지 않았고, 봄이 와도 피는 꽃을 외면했던 적이 있었다. 너무도 작은 심지에 겨우 매달리듯 흔들거리는 희미한 촛불 같았었기에, 그처럼 나약한 시절을 경험했었기에 억새의 유연한 흔들림에서 존경심까지 느끼게 된다. 다시는 타오르다 스러지고 말 양초가 되고 싶지 않다.


“바람은 여전히 강하게 불고 앞으로도 세차게 휘몰아치겠지만…….”


그래도 속절없이 꺼지게 둘 수는 없다. 간신히 불붙은 작은 심지이기에 타오르는 동안 빛을 발하고 싶다.


“그러고 싶어.”


억새에서 눈을 떼고 깔끔하고 소담한 증산마을을 내려다본다. 정선선 철도에 기차라도 지나간다면 생동감 넘치는 한 폭 풍경화일 것이다. 해발 1119m, 정상 일대는 마치 작은 시골의 장날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북새통이다. 정상석도 사진 찍는 이들로 손님 끊어질 틈이 없다.

그들의 환한 표정을 보노라니 더더욱 타오르며 빛을 내뿜는 강한 심지이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진다. 날개가 찢어진 후에야 그 날개의 의미를 깨달았으나 다시 드높고 맑은 하늘이 창창하게 열린다면 훨훨 날고자 힘찬 날갯짓을 하고 싶어 한다.

은곡고개 너머 가로로 늘어선 세 봉우리, 백두대간 두타산, 청옥산, 고적대의 마루금이 선명하다. 함백산과 그 아래로 만항재도 알아볼 수 있겠고 백운산 마천대와도 교감한다. 무엇보다 영서의 준봉 가리왕산의 의젓한 기품을 볼 수 있다는 게 반갑고 즐겁다. 나무들이 없으니 조망만큼은 걸리적거림이 없다.

고개 숙여 인사하듯 혹은 손짓하듯 하늘거리는 억새밭 사이의 잘 가꿔진 길을 걸으며 가을 정취에 듬뿍 취하고 낭만을 만끽한다. 100여 m 내리막 계단 역시 양옆으로 억새밭이다. 삼내 약수 방향과 화암약수 방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화암약수 쪽으로 간다. 처음부터 지억산芝億山을 거쳐 큰구슬골이라는 곳을 날머리로 잡았기 때문이다. 다시 오기 힘든 산을 오면 인근의 산까지 덤으로 산행해야 하는 못된 습관을 아직 고치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일시에 장터가 파장한 듯 썰렁하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민둥산 뒤로 두위 연봉이 팔짱을 낀 채 오수를 즐기고, 조금 지나 함백산도 매번 한결같던 패션인 흰 저고리를 벗고 초록과 갈색 차림으로 무척 부드러운 모습이다.

민둥산-지억산으로 향하면서 뒤돌아본 민둥산 정상.jpg 지억산으로 향하면서 돌아본 민둥산이 더욱 가을을 타게 한다


이곳저곳 눈길 던지다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정상석을 만난다. 몰운산沒雲山, 해발 1116.7m. 구름이 진다는 의미의 몰운산은 지억산의 다른 이름이다. 잡목 무성하여 조망은 전혀 없는 허름한 산정이다.

다시 지억산 갈림길로 빠져나와 화암약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소담하고 편한 숲길을 느긋이 걸어 나오면 화암약수까지 3.1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민둥산까지 5km라고 하니 화암약수터에서 민둥산으로 가려면 거리상으로는 꽤 긴 들머리인 셈이다.

고도가 낮아지며 평평한 임도 주변으로 물든 단풍을 눈여겨보면서 걷다가 아스팔트에 다다른다. 쭉 걸으면 불암사 입구가 있고 곧이어 화암약수터가 보인다. 돌비석에 불로 장생수라고 적혀있는데 불로 장생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지라 그냥 지나치고 만다. 대신 주차장 옆에 있는 쌍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이제 고이 가을을 보내줄 수 있을 듯싶다. 곱게 물든 오색단풍을 보았고 오늘 억새의 유연함에서 귀한 의지를 새겼으니 계절 붙들어둘 명분이 없다.




때 / 가을

곳 / 증산마을 증산초등학교 – 발구덕 마을 - 임도 - 민둥산 - 약수 삼거리 - 지억산 - 임도 - 화암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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