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대 악산, 경기 5대 악산> 치악산
구렁이와 꿩의 설화애서 시작하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이곳에 절을 창건하려는데 절터 연못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대사가 이 용들을 쫓아내려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던졌더니 이 중 여덟 마리는 뛰쳐나와 동해로 달아나고 한 마리가 눈이 먼 채 연못에서 이무기로 살다가 후에 승천하였다.
그지없이 무더웠던 지난여름 무한 에너지를 그대로 인수한 치악산 계류가 더욱 생동감 있는 진초록 흐름을 보여준다. 하늘 가신 어머니와 승천한 용의 모습이 겹쳐졌던 걸까. 멈춘 듯 생장의 흐름 이어가는 청정 맑은 연못 구룡소는 아릿한 젖내까지 풍겨 하나같이 그 발원이 어머니 품일 거라 느끼게 한다.
치악산도 명산답게 그 유래로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옛날 경북 의성 땅의 한 나그네가 이곳을 지나다 꿩을 잡아먹으려는 구렁이를 보고, 활을 당겨 구렁이를 쏘아 죽였다. 날이 저물어 인가에 도착하여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했는데 소복을 입은 여인이 저녁밥까지 지어주고 숙소도 내주었다. 나그네는 잠을 자다가 숨이 막혀오는 걸 느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내 남편을 죽였어.”
여인네는 낮에 죽였던 구렁이의 아내로 원수를 갚기 위해 선비의 몸을 휘감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저 멀리 절에서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마.”
나그네는 그저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땡! 땡! 땡!”하고 세 번 종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다음날 종이 울린 곳을 가보니 꿩 세 마리가 상원사의 종 밑에 죽어있었다.
나그네에게 은혜를 입은 꿩 세 마리가 각각 머리로 종을 치고 죽음으로써 나그네를 구해낸 것이다. 가엾게 여긴 나그네는 죽은 꿩들을 땅에 묻어주었다.
그때까지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고 불렸었는데 꿩을 의미하는 치稚자를 써서 그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대봉 상원사에 은혜를 갚은 보은의 종이 복원되어 있다.
선거공약 혹은 이해타산이 따르는 조건부 약속을 해놓고도 쉽사리 뒤집어버리는 정치판이나 시장경제의 행태를 자주 접하며 살아서일까. 은혜를 갚는 꿩도 대단하지만, 약속을 지킨 구렁이도 달리 느껴진다.
‘악어의 눈물’. 위선의 상징, 가증스러운 행동을 이르는 서양 격언이다.
“내 아이를 돌려주십시오.”
나일강,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악어에게 호소한다.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답을 하면 네 아이를 돌려주지.”
아이를 잡은 악어가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묻는다.
“내가 네 아이를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잡아먹겠는가?”
“돌려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아니, 틀렸어. 난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거든.”
악어는 아이의 아버지가 반대로 대답했더라도 “나는 돌려보내려 했었는데 네 대답이 틀렸으니 이 아이는 내가 잡아먹겠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갖다 붙여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궤변, 코에 걸었던 걸 빼서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억지 논리.
악어는 먹이를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먹는 습성 때문에 먹이와 함께 들어오는 염류를 몸 밖으로 배출하기 위해 먹으면서도 눈물을 흘린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먹이를 잘 삼키도록 눈물샘이 침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악어의 눈이 습하게 젖는 건 슬픈 감정이나 참회의 뜻이 있어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가증스러운 행동을 이르는 말로 악어의 눈물이란 표현을 쓰곤 한다.
눈물은 흔히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 동정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의 눈물이 참회의 눈물이 아닌 거짓의 눈물, 즉 악어의 눈물인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은 처음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낀다.
사기나 강도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밑바닥까지 몰아넣거나 살인을 저지르고 그런 후에 잡혀서 흘리는 눈물을 과연 참회의 눈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참으로 정겨워서, 진정한 속죄로 흘리는 눈물의 빛깔과 같다고 해서 동정심이 동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구룡사 가는 금강소나무 꽃길의 한 그루(혹은 두 그루) 사랑 나무 연리지를 바라보며 잠시 감성에 젖다 보니 약속을 지킨 구렁이 다리蛇足를 너무 길게 미화시켰나 보다.
비로봉, 돌탑과 그 사람의 불가사의한 경이로움
앞서 언급한 설화로 말미암아 1400여 년 전 창건 당시 아홉 마리 용을 의미하여 구룡사九龍寺로 칭했던 절 이름은 절 입구 거북바위의 끊어진 혈을 잇고자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게 된다.
노랑은 서두름을 다독거려 걸음을 멈춰 세우게 한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 아래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수령 1200여 년에 이르며 높이 60m, 둘레 14m로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이다. 또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의 은행나무도 550년 수령에 기둥 둘레가 7m나 된다.
200년 남짓한 구룡사 은행나무는 이들 은행나무보다 살아온 세월은 짧지만 샛노란 은행잎이 풍성하고 가을답기로는 으뜸이란 생각이다. 오늘도 가을을 한껏 풍미하는 은행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걸음걸이를 올려 잡는다.
세렴 안전센터에서 사다리병창으로 오르는 길과 계곡을 거쳐 오르는 길로 갈라진다. 계곡 길이 힘이 덜 들긴 하지만 사다리병창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2단으로 휘어져 내리 뿜는 세렴폭포를 지나 수많은 계단을 치고 오르며 숨을 몰아쉰다. 계단이 설치되었어도 그 이전과 다름없이 가파르다. 암벽과 숲이 잘 어우러진 풍광에 젖을 수 있어 택한 길답게 그 보답을 한다.
사다리병창에 이르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병창은 벼랑, 절벽을 뜻하는 영서지방의 방언이다. 거대한 암벽이 사다리처럼 길게 이어져 붙여진 명칭답다. 사다리병창 지나 땀을 훔치며 곳곳 둘러보니 울긋불긋 산자락마다 시절이 가을이요, 여기가 가을 명소 치악이라는 걸 각인시킨다.
그런 후에도 한동안 허리 굽혀 비로봉(해발 1288m)에 올라선다. 허리 쭉 펴고 오르는 정상이 어디라서 있겠냐만 치악산은 특히 숙이고 굽혀서 올라 정상에 이르러서야 허리 펴 숨 고를 수 있는 5악五岳 중 한 곳이다. 지금은 등산로를 다듬어 꽤 나아졌으나 예전의 여긴 올라서도 한참 후에야 돌탑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파르기가 심했었다.
원주시와 횡성군을 경계로 하는 치악산은 주봉인 이곳 비로봉을 정점으로 남대봉, 향로봉, 삼봉, 매화산 등 해발고도 1000m를 넘는 준봉들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남쪽 남대봉부터 여기 비로봉까지 능선의 길이가 24km에 달한다.
예로부터 험준한 산세로 천연의 군사요충지였고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영원산성을 비롯하여 금두산성, 해미산성 등이 있다. 큰 산답게 입석대, 세존대, 신선대, 구룡폭포, 세렴폭포, 영원폭포 등 자락 곳곳마다 볼만한 명소가 산재해 있다.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바 있고 1984년에 치악산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오악 신앙의 하나로 동악단을 쌓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원주, 횡성, 영월, 평창, 정선의 다섯 고을에서 제를 올렸다.
치악산에 올랐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돌탑은 경이로움 그 자체로 시선을 머물게 한다. 비로봉에 돌탑이 생긴 내력을 들으면 앞서 연못에 부적을 던져 떼거리 용들을 물리친 의상대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대단한 내공을 실감하게 된다. 강원도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진수라는 사람의 얘기다.
어느 날 그가 꿈을 꾼다. 3년 안에 비로봉에 3기의 돌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 그는 그 계시를 받들어 1962년 9월부터 1964년까지 혼자서 5층 돌탑을 모두 쌓았다.
그 후 1967년과 1972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졌으나 그는 각각 그해에 돌탑을 복원해냈다. 치악산 비로봉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거기 세워진 돌탑을 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불가사의한 일을 추진했던 용 진수 씨가 1974년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오름길 1288m. 거기까지 올린 저 돌들, 그리고 쌓은 세 개의 탑. 다시 복구. 그 어떤 설화가 이보다 극적이고 위대할까.
1994년 이후 두 번이나 벼락을 맞아 돌탑이 무너지고 말았다. 2004년 치악산 국립공원에서는 치악산 일대에 산재해 있던 40톤 분량의 돌들을 헬기로 수송해서 복원하였다. 다시 벼락 맞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겠기에 돌탑 주변에 광역 피뢰침을 설치하였다.
복원이 완료된 후 원주시는 2005년 새해 첫날 ‘치악산 비로봉 돌탑 복원기념 새해맞이 등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미륵불탑이라고 명명된 이 탑들의 남쪽 탑은 용왕탑이라 하고 가운데 것은 산신탑, 북쪽의 탑을 칠성탑이라 한다.
돌탑의 시원이기도 했던 그 사람, 용진수. 그 사람이야말로 구룡소에 남아있던 마지막 용은 아니었을까.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용진수라는 인물을 곱씹으며 내딛는 입석사 방면의 하산 길에도 자꾸만 뒤돌아 돌탑을 바라보게 된다.
신의 계시든, 본인의 의지이든 그러한 일은 할 수 있는 사람만 하는 거라고 치부하며 스스로 나약한 의지를 합리화시킨다.
오늘은 마애불과 입석대를 둘러보기로 한다. 예전에 황골에서 오르며 올라가기에 바빠 입석사도 눈길만 스쳤을 뿐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연꽃 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마애불이 오후 햇살을 받아 그 새김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元祐五年庚午三月日원우오년경오삼월일’,
마애불이 조성된 연대 원우 5년은 고려 선종 7년 때인 1090년이라고 하니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흐릿하게 마모되었지만, 여전히 마애불은 의연하게 상체를 세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치악산에는 한때 76개의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었다. 지금은 구룡사와 이곳 입석사, 상원사, 석경사, 국형사, 보문사가 남아 여전히 치악산에 그윽한 풍경 소리를 메아리치게 하고 있다.
입석사 대웅전 뒤로 설치된 철 계단을 오르면 높이 50m의 절벽 위에 10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네모꼴 바위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입석대다. 입석대에서 바라보는 비로봉과 그 아래쪽 풍광 모두 생기 넘치는 가을이다. 속세로 되돌아가기 전에 눈과 마음을 맑게 정화하려 자연이 연출한 비경에 한참 동안 젖어든다.
석양 녘 해거름 음울하게 깔리거든
나 내려온 저 봉우리 그윽하게 바라보다
느긋한 술잔 주거니 권커니
얼큰하게 기울이며
그리 빈한하지 않은 척
괜한 허세 부리지만
허기진 상처 살로 굳어질까 노을은
뼛속으로 번진다오
입석사를 나와 날머리 황골에 이르자 주황빛 해거름이 산 아래 단풍들을 더욱 짙게 물들인다.
한나절 머물렀던 가을 산에서 마치 홀로 남겨두는 그리움의 실체를 느끼는 것일까. 석양 녘 가을 산에서 내려오면 한낮의 생기 넘치던 풍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쓸쓸한 여운이 남는다.
때 / 가을
곳 / 구룡사 매표소 - 구룡사 - 세렴폭포 - 사다리병창 - 비로봉 - 입석사 - 황골